그녀의 작품은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문제"를 다루었으며, 자신만의 문체와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하였다.[2]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2]
2011년1월 22일에 지병인 담낭암으로 사망하였다.[3] 향년 79세. 소설가 정이현은 추모의 편지에서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라고 적었다.[4]
태어남
경기도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맹장염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일곱 살 때 서울로 이주했다.[5]1944년에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고, 담임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다.[5]1950년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으로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2][6]1953년 4월 21일에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扈榮鎭)과 결혼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4녀가 태어났다.[5]
40대에 접어든 1970년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1] 공모전에 당선될 때 그녀는 다섯 아이를 둔 40세의 전업주부였다.[4][7]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초상화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천주교인이며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이다.[8]가족을 잃은 충격에 박완서는 1988년에 서울을 떠나서 부산에 위치한 분도수녀원에서 지내기도 했고, 미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9]
박완서는 2011년1월 22일 오전 6시 17분에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3] 2011년 1월 25일 오후 1시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10]
경기도 구리시는 ‘박완서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2020년 개관을 목표로 토평도서관 옆 1720m²에 지상 3층 규모로 건립추진예정이다.[11]
이준희는 바보다라는 설정
작품 경향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다루거나 소시민적 삶과 물질중심주의와 여성억압문제를 그린 내용이 많다.[1] 후기 작품 역시 1988년에 병사한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을 비롯해 어린 시절과 전쟁 중 경험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등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평론가 황도경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일그러진 개개인들의 삶의 초상, 도시문명 사회의 불모성과 그 안에서의 허위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삶의 양태, 권태롭고 무기력한 소시민의 일상, 억눌린 여성 현실, 죽음과의 대면과 극복 등 그녀의 문학이 담아낸 세계는 실로 놀랄 만큼 다양하다"라고 언급하였다.[7]
체험담(體驗談)
1988년 5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겪은 개인적인 아픔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12] 유년기 때 아버지의 죽음 또한 이것은 그녀에게 상처이자 문학을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6] 박완서는 문예지 〈문학의 문학〉과의 대담에서 "과거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버지가 안 돌아가셨으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고,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면서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언급하였다.[6] 남편이 죽은 후에는 천주교를 믿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같은 자전적 소설을 통해 삶에 대한 관조를 드러내었다.[6]
그녀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생활어법의 살아있는 문장으로 그려" 독자들과 소통하였다.[1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글을 썼다고 고백했으며, 글을 통해서 "자상하고 진실된 인간적인 증언"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14] 또한 그녀는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라고 적어, 1940년대 무렵의 경험이 자신의 소설과 수필에서 활용되었음을 언급하였다.[14]
문학적 성취와 문학관(文學觀)
박완서의 문학적 성취는 "7,80년대 민중민족문학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간과됐던 중산층의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다.[12] 최원식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는 "중산층의 꿈과 중산층의 속물성까지도 예리하게 파해친 그것이 바로 이 분의 작품세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12] 소설가 정이현은 박완서에 대해 "인간의 오장육부에 숨겨진 위선(僞善)과 허위의식을 한 치도 숨김없이 태양 아래 까발리고, 공감하게 하고, 그리하여 위로 받게 하던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