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도중 동갑내기 여성 극성팬에게 황산테러를 당했으나 다행히 얼굴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범행을 저지른 여성팬은 이전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집에 찾아 가거나 전화를 걸었으며 공연 대기실에도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지 당한적이 있었다. 범행 이유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미소라 히바리가 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 정도의 치료 후 1월 29일 다시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직후인 1964년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야와라》(柔)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발표한 1966년의 《가나시이사케(悲しい酒)》는 145만 매, 1967년의 《맛카나타이요(真赤な太陽)》는 140만 매를 판매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후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한 친구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7년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 개월간 요양한 뒤 8월 3일에 퇴원하고, 10월에 신곡 '흐트러진 머리'라는 뜻의《미다레가미(みだれ髪)》를 레코딩 해 복귀한다. 1988년4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복귀 콘서트 《불사조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 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쇼와 일왕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1월 11일에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을 발표한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다시 입원과 일시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3월 21일에 자택에서 닛폰 방송의 라디오 특집 생방송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을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 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1989년6월 13일에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사후
1989년7월 4일에 일본 여성 최초로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이 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요코하마시고난구(港南区)에 안장되었다. 이 후에도 수년간 가요제의 특별상 등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1993년에 교토시에 “미소라 히바리관”이 개관하였으나, 이용자 수의 감소로 2006년11월 30일에 폐관되었다. 폐관된 히바리관은 히바리 프로덕션에서 18억 엔에 매입하여, 2008년 봄에 다시 오픈한다고 발표되었다.[1]
2005년에 공개된 영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되어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상영회 등이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최후의 곡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9년9월 29일 방송의 NHK 스페셜에서 과거의 방대한 영상이나 음원을 바탕으로, 최신의 AI기술을 이용해 종달새의 라이브를 재현하는 시도가 행해졌다. 4K · 3D의 등신대의 홀로그램 영상으로 스테이지상에 "본인"을 출현시켜, 야마하가 개발한 심층학습기술을 이용한 노랫소리 합성기술 VOCALOID:AI에 의해 새롭게 제작된 악곡 《아레가라(あれから)》(작사 : 아키모토 야스시 · 작곡 : 사토 카후)를 노래하게 하는 모습이 방송되었다[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