쭐랄롱꼰(태국어: จุฬาลงกรณ์, 1853년9월 20일 - 1910년10월 23일, 재위 : 1868년 - 1910년) 또는 라마 5세 정식 명칭은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민타라 마하쭐랄롱꼰 프라쭐라쫌끌라오 짜오유후아(태국어: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มินทรมหาจุฬาลงกรณ์ฯ พระจุลจอม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는 태국의 국왕이자 차크리 왕조의 5번째 군주이다. 2016년에 즉위한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국왕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1868년 왕위에 올랐으며, 영국와 프랑스의 압박 속에서도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의 업적은 지식인과 왕족들의 유학을 장려하였으며,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그리고 교통, 행정, 사법, 우편, 철도 등을 정비하여 태국 근대사에 큰 기여를 했다.
어린 시절
쭐랄롱꼰은 1853년9월 20일에 몽꿋 왕과 데브시리인드라 왕비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자 때의 이름이 쭐랄롱꼰이다. 1861년 그는 ‘끄롬마메운 삐까네수안 수랏상깟’(Krommameun Pikanesuarn Surasangkat)이라는 직위를 부여받았다. 그의 부왕은 유럽인 교사 안나 레오노웬즈와 같은 튜터를 붙여서 그에게 폭넓은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1866년 그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왓 바워니웻에서 상하(수도승)가 되었으며, 1867년 복귀하자마자 그에게 ‘끄롬 마쿤 삐닛 쁘라차낫’(Krommakhun Pinit Prachanat)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1868년 일식 관측을 위해 왓코르에 방문을 했다가 몽꿋 왕이 병이 들었다. 그가 유언을 남기는 자리에서 몽꿋 왕은 "내 형제, 내 아들, 내 손자, 나라를 구하려고 생각하는 지도자 모두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하여 왕좌에 앉힐 왕자를 뽑았고, 쭐랄롱꼰 왕자가 왕으로 선택되었다. 왕자는 당시 15살이었고, 차오 프라야 시 수리야웡세가 섭정으로 선택되었다. 즉위식은 1868년11월 11일에 거행되었다.
젊은 왕
1873년 왕은 다시 승려가 되었다가 돌아왔다. 그의 두 번째 대관식은 같은 해 왕의 성년을 축하하기 위해 거행되었다.
섭정이 끝나자, 시 수리야원세는 솜뎃 차오 프라야로 격상되었고 이것은 대신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 시 수리야원세 자신도 19세기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그의 분나그 가문은 라마 1세 이후로 시암의 정치를 좌우했던 페르시아 후손 계열의 강력한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쭐랄롱꼰은 이복 동생 네 명과 결혼을 했으며, 그들은 모두 쭐랄롱꼰 왕의 딸들이었다. (사방 바드하나, 사오밥하, 그리고 수난다와 수꾸말마르스리)
같은 해 쭐랄롱꼰의 첫 번째 개혁은 부패한 세금 징수로 인한 폐단을 고치기 위한 감찰관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세금 징수관은 여러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또한 그들도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충돌
186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하에 있던 캄보디아의 노로돔 국왕이 축출되었다. 1867년 캄보디아의 양도가 공식화되었다. 캄보디아를 구성하고 있는 바탐방, 씨엠립, 스리소폰은 시암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영토 양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