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최초로 야구가 전해진 해인 1905년에 한성고등학교가 학교 차원에서 야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경신, 휘문, 배재 등 다른 학교에도 야구팀이 생기면서 활발한 교환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학교 야구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 1920년에는 조선체육회 발족 기념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1921년부터는 일본의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지금의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조선지역 예선이 생겨, 조선의 학교가 조선대표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출전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주로 경성중학교 등의 일본인 학교가 주로 출전했었지만, 부산공립상업학교, 휘문고보 등 조선인이 세운 학교도 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있다.
한편, 동아일보사는 1926년에 경신, 배재, 중앙, 휘문 등 4개 중등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4구락부 연맹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 대회는 1936년 동아일보사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정간되면서 광복때까지 대회가 10년 가까이 중단되기도 했다.
고교 야구의 중흥기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자유신문사의 주최로 열린, 첫 야구 대회인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다음해인 1947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전국지구대표 중등야구 쟁패전이 시작되었고, 1949년에는 지방언론사에선 최초로 부산의 산업신문사가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위 대회들이 2년에서 4년간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위의 대회는 계속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에 있었던 학제 개편의 영향으로 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로, 중등야구 쟁패전은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청룡기는 자유신문사의 간부들이 전쟁중에 납북되면서 조선일보사가 이때부터 대회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의 고교야구는 몇몇 학교가 우승을 휩쓰는 분위기가 있었다. 1950년대에는 주로 동산고등학교(6회)와 인천고등학교(5회)가 선전했었다. 1969년에는 선린상업고등학교가 그 해의 모든 대회 우승을 휩쓸었고, 1971년에는 경북고등학교가 한 해에 서울에서 열리는 4개의 전국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후로 한 학교가 한 해의 모든 대회를 우승하는 사례는 물론, 서울의 4대 전국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82년에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고교야구의 인기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어갔다. 하지만 명승부는 계속되었고, 이후 고등학교때 활약했던 선수들이 프로에 바로 진출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대회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늘어났다. 1994년에는 광주일보사가 광주에서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열었고, 2003년에는 인천일보사의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인천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주말 리그제 도입
2011년부터는 선수들의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겠다는 취지하에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시작된다, 리그제의 도입으로 기존의 대회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축구의 FA컵과 유사한 성격의 대회인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폐지되고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대신하게 되었으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고교야구 주말리그 전반기 전국 대회가 되었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는 고교야구 주말리그 후반기 전국 대회가 되었다. 전국체육대회 고등학교 야구는 기존대로 시행하고 위의 4개 대회 외에 언론사 주최 전국고교야구대회는 전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