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도라지로(虎次郎)이며, 자는 헤이케이(炳卿)이다. 고난(湖南)은 그의 호이며 별호는 흑두존자(黒頭尊者)이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함께 전전을 대표하는 동양학자이다. 전전의 야마타이국 논쟁, 중국의 당송변혁 등 당송변혁시대구분논쟁 등으로 학계를 이분하였다.
생애
교토 상경까지
1866년 무쓰국게마나이정(오늘날 아키타현가즈노시 도와다게마나이(十和田毛馬内))에서 난부번(南部藩) 번사(藩士)인 나이토 조이치(内藤調一, 호는 주완(十湾), 1832-1908)와 요코(容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완은 절충학파(折衷学派)에 속하였다.
6세에 『대학』(大学)을 4개월만에 떼고, 7세에 『이십사효』(二十四孝)와 사서(四書)를 익혔으며, 13세에는『일본외사』(日本外史)를 통독하였으며,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친구나 세간 평판 역시 '학문을 잘 해도 잘난 체 하지 않고 싸움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기특한 아이다'라고 했다. 아키타사범학교(秋田師範学校) 이학 후에도 혼자 기독교 교회에 다녔으며, 미국인 선교사 갈스트 스미스에게 『만국사』(万国史) 등을 배웠다.
1884년, 아키타사범학교를 4년 과정을 2년반만에 졸업하고, 10대에는 쓰즈레코소학교(綴子小学校)의 실질적인 교장인 주석훈도(主席訓導)가 되었다.
언론 활동
1887년 교토에 상경하여 오우치 세이란(大内青巒)의 불교잡지 「명교신지」(明教新誌)의 편집에 종사하였고, 이어서 세이란의 「만보일람」(万報一覧)과 「대동신보」(大同新報)의 기자를 한 후에, 국수주의 성향의 세이쿄샤(政教社)에 입사, 기관지 「일본인」(日本人), 「아세아」(亜細亜, 「일본인」의 대리 잡지)의 편집을 더하였다[2]. 이후 「미카와신문」(三河新聞)과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대만일보」(台湾日報), 「만조보」(万朝報) 등의 편집으로 이름을 떨쳤다. 러일전쟁에서는 개전론을 주장했다.
10년간 저널리스트로 근무한 이후, 1907년 학생모집을 시작한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의 동양사학강좌 강사로 취임하고 1909년 교수로 되었다.[3] 강사가 된 후, 동양사 담당강좌에 햇수로 20년을 일했고, 동료 가노 나오키와 구와라 지쓰조(桑原隲蔵)와 함께 「교토지나학」(京都支那学)을 형성, 교토대학의 학보(学宝)로 칭해졌다.
1910년, 교수 재임 기간이 1년이 되었기에, 가노 나오키 총장의 추천으로 문학박사[4]가 되었다.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청조사 통론』(清朝史通論)은 그의 박사호가 관습에 의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박사논문에 상당하는 논고를 써야 한다고 결의하고 집필한 것이어서 이 논문 자체는 박사학위 논문은 아니다.
도쿄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와는 '동쪽의 시라토리 구라기치, 서쪽에는 나이토 코난'이라고 칭해졌으며, 또한 '실증학파의 나이토 코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라고도 병칭되었다. 특히 야마타이국의 소재지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야마타이국 기나이설을 주장, 야마타이국 규슈설을 제창한 시라토리와 큰 논쟁을 벌였다.
만년
1926년, 대학 60세 정년제에 따라 교토제국대학을 은퇴하였고[3]제국학사원에 선출되었다.[5] 은퇴 후는 교토부 베하라촌(瓶原村, 현재 기즈가와시)에 은거하여 독서와 저서의 나날을 보냈다.
사론의 대표적인 것으로 독특한 문화사관에 근거, 중국사 시대구분을 당과 송 사이를 크게 시대 구분하는 것을 당송변혁론이라고 한다. 나이토는 진한시대를 상고(上古)로 규정, 후한부터 서진 사이를 제1차 과도기로 보았고,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 중기까지를 중세로 보았다. 그리고 당 후기부터 오대십국시대를 제2차 과도기로 하였으며, 이 시대를 크게 사회가 변용하였다고 보았다.
이 설은 나이토 사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등의 차세대 교토학파가 발전시켰고, 송 이후 중세설을 제창하는 역연파(歴研派, 歴史学研究会)와의 시대구분논쟁이 전개되었다.
오닌의 난의 일본사에서의 의의
1921년 강연인 〈오닌의 난에 관하여〉에서는 "일체 다른 류의 시합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나의 전문에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다소 도발적인 서론을 말하면서도 "대체로 오늘 일본을 알기 위해 역사 연구하는 것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외국의 역사와 같은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오닌의 난 이후는 우리의 진실한 신체 골육에 직접 닿는 역사이어서, 이를 진실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의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8][9] 이 발언은 일본중세사를 논할 때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10][11]
에피소드
일본 센고쿠시대 무장 나이토 쇼호(内藤昌豊)의 자손이라는 가계 전승을 가지고 있으며, 코난은 아버지 주완의 명으로 나가시노 전투가 있었던 옛 전장터의 쇼호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12]
코난을 교토제국대학 교수로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사람은 당시 학장 가노 고키치(狩野亨吉)였으나, 문부성(에서 이에 대하여 난색을 표하였다. 아키타사범학교 전신 아키타현 전습학교(伝習学校) 졸업이라는 학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부처님도 공자님도 학력 없는 인간은 (교토제국대학 교수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문부성측은 말하였다고 들었으나, 가노가 마침내 '나이토를 쓰지 않으면 나도 관둔다'라고 밀어부쳤다고 한다(이즈음 쌍방의 교환에 대한 설이 여러 있으나 발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강의할 때 목소리가 매우 아릅다워 금성옥진(金声玉振)이란 이런 것인가라고 제자인 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가 회상한 바 있다.
본명 '도라지로(虎次郎)'는 아버지 주완이 요시다 쇼인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쇼인의 통칭인 '도라지로(寅次郎)'에서 이름을 따왔다. 주완은 실제로 쇼인을 만난 적이 있다. 또한 아버지 호 '주완(十湾)'과 아들 호 '고난(湖南)' 모두 인근의 도와다호(十和田湖)로부터 따온 것이다.
1884년 주석훈도로 근무한 쓰즈레코소학교(綴子小学校)는 주완 등이 난부번(南部藩)의 병사가 18년전 보신전쟁 중 아키타전쟁(秋田戦争)에서 전투를 수행, 민가를 태우고 철수한 츠즈레코손(綴子村, 현재 아키타현 기타아키타시北秋田市)에 있다. 보신전쟁과 그 피해는 생생히 민중 사이에 남아 있다. 그러나 코난은 과외로 여어를 가르치고 교과서도 없는 이과 실험 등을 하는 등 신교육을 베풀어 촌민의 신뢰를 받았다고 전한다. 코난을 발탁한 가노는 아키타전쟁에서 아버지가 일한 낙성 직전의 다이칸조(大館城)에서 떠나, 누이에게 엎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서 히로사키번으로 도주한 적 있다.
쓰즈레코소학교는 아키타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학교인 나이칸주쿠(内館塾)의 후신 소학교이다. 나이칸주쿠에는 한냐인에센(般若院英泉)이나 미야노 쓰기토모(宮野尹賢) 등이 남긴 고문서가 다수 남아 있었다. 나이토 고난은 이런 고문서를 연구하였다고 한다.또한 식비 이외는 봉급의 전부를 신간 도서나 잡지 구입에 들여서 신지식을 흡수했다.
기억력이 좋고 친구와 지인의 장서에도 정통하였으며, 필요하면 전화를 친구에게 걸어 '너희집 어떤 서가의 몇번째 단의 이러이러한 책 몇 페이지 즈으메 이러한 것이 쓰여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조사해 두었으면 하네'라는 방식으로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13]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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