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녕이며, 1953년 9월 17일 일본도쿄도에서 아버지 김철과 어머니 윤초옥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함경북도 출신이다. 7세 때 부모와 함께 대한민국에 귀국하였고 서울덕수초등학교를 다녔다. 1976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서 기자와 지사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는 강원룡 방송위원장을 보좌하며 기획국장, 사무총장 서리를 역임했다. 방송위 재직 당시에 신문에 '여자의 남자'를 연재하며 소설가로 활동했다.[4]
1988년 발표한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작사하였다. 1993년부터 MBC의 《김한길과 사람들》을 진행하며 방송 활동을 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 동작구 을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5] 이후 제14대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의 공보특별보좌관을 맡아 홍보 전략을 총괄했다.[6][7] 1995년 6월 10일 배우 최명길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됐고 이듬해에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의 홍보와 TV 토론을 총괄했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내며 일본문화개방,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 기획, 문화콘텐츠진흥원 설립, 한국문학번역원 설립 등을 주도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 당시에는 도야마 아츠코 일본 문부과학상과 장관 회담을 통해 교과서 재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17대 국회 전반기 건설교통위원장을 지냈고, 국회 신행정수도후속대책특위 위원장을 역임하며 정부기관 세종시 이전 작업의 밑그림을 그렸다. 2006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나간 정세균 의원의 후임으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돼 노무현 정부의 여당을 이끌었다. 이듬해 2007년에 친노패권주의와 운동권 중심 정치에 반발해 당내 중도-보수성향 의원들(김한길계)과 탈당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한 후 대표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은 중도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등으로 이어졌다. 2008년 1월 6일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자임하며 "노무현 프레임 극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가 실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고, 제18대 총선에 불출마할 것을 약속했다.
2012년 4월 11일에 열린 제19대 총선에 출마하여 광진구 갑에서 당선되었다. 2012년 6월 9일 실시된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8명의 후보 중 근소한 차이로 2위(1위 이해찬)를 하여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이후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18대 대선 실패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2013년 5월 4일 실시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다음해 3월 26일에 안철수가 이끄는 새정치연합과 합당한 후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 패배한 책임을 지고 안철수와 함께 동반사퇴하였다. 2016년 1월 3일 친문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후 국민의당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2016년 3월 17일 20대 총선에서 야권 연대가 무산된 책임을 지고 이번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였다.[8] 이후 국민의 당에서 바른미래당, 민생당으로 자연히 당적이 승계되었으나 정당 활동을 하지 않았고, 2022년 8월 공식 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