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 운동의 최종 진압 작전을 눈앞에 둔 1980년 5월 26일 광주의 민주화 항쟁 대학생대책본부는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미(美) 항공모함 두 대가 정박해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민여러분 안심하십시오"[1]라는 내용의 가두방송을 했다. 하지만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은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상황을 방관했다. 결국 광주시민은 미국으로부터 쓰디쓴 배신감을 맛보았다. 배신감은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광주 민주화 항쟁의 주역들이 반미 선구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전개
광주 진압 과정에서 미국의 아무런 도움이 없자 분노한 학생운동가 및 노동운동가들은 미국대사관과 미국문화원 등에서 반미 규탄 집회를 벌였으나 묵살당했다. 1980년 12월 9일 대학생들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장이었던 정순철(당시 27세) 등은 휘발유와 시너를 준비, 12월 9일 밤 문화원 직원들의 퇴근을 확인한 후 농민회원인 김동혁, 박시영, 윤종형, 임종수 씨 등과 함께 광주 미문화원 지붕에 구멍을 뚫고 사무실 바닥에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와 성냥으로 불을 질렀다.[1]
광주 미문화원 방화투쟁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은폐됨으로써 그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방화가 아닌 단순한 전기누전으로 이야기하다가, 투쟁 참가자들이 밝혀진 뒤에도 '부랑아의 영웅심리의 발로'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투쟁의 소식은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