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원 의원(12선)과 내각총리대신(제87·88·89대), 우정대신(제56대)과 후생대신(제73·74·86대), 자유민주당 총재(제20대)를 지냈으며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두번 째로 긴 장기 집권기간 (1,980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그의 첫 임무인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등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퇴임 후 수년간 대중 앞에 나서지 않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13년 후쿠시마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포기 옹호론자로 복귀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 중과 이후 모두 포함해서 자민당이 지지해 왔던 친 원자력 발전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3대에 걸친 정치인 집안 출신이다. 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몸에 큰 문신을 하고 다녀 "문신 장관"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마구치 총리와 와카쓰키 총리 내각에서 우정성 장관을 지냈으며 우편 민영화의 초기 옹호자였다. 부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는 방위청 장관도 역임했다.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는 배우로 활동 중이며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2009년7월 2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준이치로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 당선되었다.
성장 배경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에서 태어난 고이즈미 총리는 요코스카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9년 8월 아버지의 부음으로 귀국할 때까지 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재학했다.
귀국 후 고이즈미는 자민당(LDP) 후보로 일본 하원 선거에 나갔으나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해 낙선했다. 1970년 당시 일본 재무부 장관이었던 후쿠다 다케오의 비서로 발탁되었는데, 후쿠다 다케오는 1976년 일본 수상이 된다.
1972년 12월 총선에서 고이즈미는 가나가와현 제11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자민당 내 후쿠다 파벌에 합류했다. 그 이후로, 그는 10번 재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