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최씨(耽津崔氏)의 시조(始祖)인 최사전(崔思全1067~1139)은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의 손자이며,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다.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1]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
• 中書令公派(水原) 崔應奎(六世) 華城派
• 孝宗公派(金浦) 崔孝宗(十四世)
• 副護軍公派(莘里) 崔孝忠(十四世)
• 都正公派(三槐) 崔孝源(十四世)
• 萬戶公派(新平) 崔臨淮(十二世)
• 臨漢公派(陽城) 崔臨漢(十二世)
• 貞愍公派(高揚) 崔潔 (十一世)
• 華川公派(華川) 崔龍阯(九世)
• 鳳山公共(鳳山) 崔原吉(八世)
• 康津進士公派(康津) 崔浚良(六6世) 康津錦川派
• 光州泉谷派(泉谷) 崔沈(十二世)
• 谷城竹谷派(谷城) 崔以福(十九世)
• 康津巷洞派(巷洞) 崔碩祚(十二世) 康津大口派
• 康津梅山派(梅山) 崔奉時(十二世) 康津城東派
• 進士公派(萬頃) 崔孝老(中組一世) 萬頃派
• 寶城靈巖君派(靈巖) 崔聰(中組一世) 輔成兆內
• 光州遜菴(城西) 崔允德(中組一世) 光州城西派
• 光州洑作派(洑作) 崔弘建(中組一世)
• 光州西隱派(西隱) 崔黽祥(中組一世) 光州西外派
인물
최상(崔尙) : 1035년(고려 정종(靖宗) 1년) 과거에 급제하여 1056년(문종 10) 예부낭중으로 칠도순무사(七道巡撫使)로 파견되었다. 1068년(문종 2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2]
최부(崔溥, 1454년 ~ 1504년) : 1482년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486년 문과중시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監察)·홍문관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냈다.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표류했다. 반년 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표해록(漂海錄)》를 저술하였다.
2000년 지역별 인구는 서울 16,833명, 부산 1,903명, 대구 510명, 인천 3,304명, 광주 11,030명, 대전 1,473명, 울산 445명, 경기 13,465명, 강원 666명, 충북 593명, 충남 2,373명, 전북 6,330명, 전남 7,012명, 경북 521명, 경남 1,182명, 제주 48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