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가평(嘉平, 249년 ~ 254년) 연간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비범하였고 최유(崔遊)에게 가르침을 받아 한족의 문화에 정통했으며 문무를 겸비했다. 삼국시대 말기에 인질로써 조위의 수도낙양에 들어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서진 초에 아버지 유표가 죽자, 뒤를 이어 흉노의 좌부수(左部帥)가 되었다. 태강(太康, 280년 ~ 289년) 말엽에 서진은 흉노 5부에 도위를 설치하였는데, 유연은 북부도위가 되었다. 유연은 북부도위로서 정치를 잘해서 5부 전체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서진에서 양(楊)씨가 집권하던 시기엔 5부 전체를 통괄하는 5부대도독이 되었다.
304년10월에 유연의 종조부인 좌현왕 유선(劉宣)은 여러 흉노 유력자들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몰래 전해들은 유연은 사마영을 속이고 업을 빠져나와 유선 등으로부터 대선우의 칭호를 받고, 이석에서 거병하였다. 뒤이어 좌국성(左國城)으로 거점을 옮겨 한왕(漢王)으로 즉위했고 건원하여 연호를 원희라고 하였다.
308년10월에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영봉으로 개원하였다. 다음해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하서로 개원하였다. 이후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략하려 했으나, 뜻을 절반밖에 이루지 못한 채 병사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유연이 죽을 때 조카인 태재(太宰) 유환락(劉歡樂), 태부(太傅) 유양(劉洋), 태보 유연년(劉延年) 등을 불러들여 대사마·대선우·녹상서사(錄尙書事)였던 자신의 셋째 아들인 초왕유총과 힘을 합쳐 황태자 유화를 잘 보필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향년 60세.
당 태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진서》에서는 고조의 휘를 피해 자인 유원해(劉元海)라고 표기하였다.[1]
일화
큰 뜻을 품었고 관용이 풍부했던 영걸로 알려져 있다.
유연의 종제(從弟)이자 처남이었던 호연유(呼延攸)는 숙부이며 장인이었던 호연익의 아들이었다. 유연은 그의 무능하고 속물적인 인격을 꺼리고 싫어하여 결코 요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화는 숙부 호연유와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숙부 호연유를 재상직에 앉혔다. 유화는 숙부의 조언에 따라 이복동생인 초왕유총을 숙청하려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파멸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유연이 현명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호연유는 정치가로써는 무능했다는 것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