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러시아키슬로보츠크에서 출생하여 로스토프 대학교에서 물리·수학을 전공하면서 모스크바에 있는 역사·철학·문학 전문 학교의 통신 과정을 이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소련군에 자원 입대하여 포병 장교로 참전하였다. 1962년 소련 문학 잡지인 <노비 미르> 편집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스탈린 시대 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연재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소련의 관료주의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를 발표하여 논란의 초점이 되었다. 두 번째 단편이 발표되면서부터 보수파 평론가들은 "역사적 진실을 잘못 이해한 작품"이라고 비판을 가했으나, 이어서 스탈린 시대를 주제로 한 <암병동>과 <연옥 1번지>를 완성하였다. 두 작품 모두 국내 출판이 금지되어 외국에서 출판하였다. 위의 작품들이 서방에서 출판되자 정부와 소련 작가 동맹은 그에 대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그 역시 이에 맞서는 공개 서한을 두 번에 걸쳐 작가 동맹에 보낸 바 있다.
1969년 11월에 반소 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작가 동맹에서 추방되었으나 1970년 12월, 러시아 문학의 훌륭한 전통을 추구해 온 윤리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흐루쇼프 정권에서 조치하는 사실상 명예 회복 조치도 받았다. 1971년 제1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한 역사 소설 <1914년 8월>을 파리에서 출판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1973년12월 28일, 유형지에서의 잔학상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가 해외에서 발표되자 서독으로 추방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 후 1994년에 러시아로 다시 돌아왔고, 같은 해 시베리아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언어, 문학 분과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이그나트 솔제니친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솔제니친은 물질주의와 구 소련 체제 등을 함께 비판하며 전통적인 애국주의로의 회귀를 촉구해왔으며, 2008년8월 4일 새벽, 90세의 나이로 지병으로 별세하였다.[2] 러시아 언론들은 솔제니친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적인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긴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며 애도하였다.[3]
다른 작품으로 <자히르칼키타>, <사슴과 라겔리의 여인>, <오른손> 등이 있다.
정치적 성향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솔제니친은 시종일관 중도주의를 중요시하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설 중 "공산주의는 아직도 치료할 수 없는 최악의 미치광이 병"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매달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4] 하지만 그는 서구 비평가들로부터 반유대주의자이자 범슬라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85년 그는 미국 상원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의 저서 <1914년 8월>에서 반유태주의적인 분위기가 보인다고 말하자, "참석자들의 의견은 전형적이었다. 그 누구도 작품을 읽지 않은 대신 한두 전문가 의견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소련에서 <1914년 8월>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반애국주의자라고 매도한 것과 똑같았다."며 혹평하기도 하였다.[5]
1994년 러시아로 돌아온 후 그는 계획 경제체제에서 급격히 혼합경제체제로 경제 개혁을 단행한 보리스 옐친 행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1998년에는 옐친 행정부가 그에게 성 안드레이 페르보잔노보 훈장을 서훈하기로 하였음에도 그는 "몇몇 권력자들 때문에 러시아는 실패한 국가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이 상은 수여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했다.[6]
Solzhenitsyn, Aleksandr I (1978), 《A World Split Apart》 (commencement address to the graduating class), Harvard University: OrthodoxyToday.org, 2008년 8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8월 9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