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에 이어 천황의 외장인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간파쿠를 맡았지만, 949년에 다다히라가 죽으면서 이후 섭관을 두지 않고 천황이 친정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섭정인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모로스케 형제에게 있었고 어머니인 온시와 형 스자쿠 법황도 후견을 명목으로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기 때문에 친정은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문치면에서는 951년에 《고센슈》의 편찬을 하명하거나 960년 3월에 내전가합을 열었으며, 와카(和歌) 작가이자 가단의 비호자로서 후세에 평가된다. 또 거문고·비파 등의 악기에도 정통해 헤이안 문화를 개화시킨 천황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의 치적은 '덴랴쿠의 치'로서 후세에 칭송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외척 정치의 토대가 강화되어 관리 기강에 공정함이 없어졌으며 960년 내전 소실을 시작으로 수많은 재난이 있었다.
967년5월 25일, 42세로 사망하였다. 또 황자 도모히라 친왕의 후예는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로서 이후 궁정 정치에 큰 영향력을 주게 된다.
일화
무라카미 천황은 『오오카가미』(大鏡) 미치나가 하(道長下)에 있는 오우슈바이(鶯宿梅, おうしゅくばい) 일화로 유명하다.
어느 날 대궐 청량전(清涼殿) 앞에 있던 매화나무가 말라 버렸는데, 천황은 이를 대신할 다른 나무를 찾도록 명했다. 이곳저곳을 찾아 보았으나 대체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사자는 교토 바깥에 있는 어느 집에 매우 훌륭한 홍매화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자는 곧 왕명이라 말하며 홍매화나무를 파내어 대궐로 옮기도록 했고, 이때 매화가 심어져 있던 집의 주인은 단자쿠를 가지에 매어 가져가게 하였다.
청량전 앞에 옮겨 심은 그 홍매화나무는 전에 그 자리에 있던 것 못지 않은 훌륭한 것으로 천황은 크게 기뻐하였는데, 문득 가지에 단자쿠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수상쩍게 생각하고 풀어보니, 거기에는 여성의 글씨로 「칙명이로되 저기 꾀꼬리 와서 제 둥지를 물으면 어이 답할고」(勅なればいともかしこし鶯の 宿はと問はばいかが答へむ)(해석: 칙명이라 송구하옵게도 거절할 수는 없으나, 이 홍매화나무 가지에 해마다 찾아와 둥지를 틀던 꾀꼬리가 돌아와서 우리 집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라는 노래가 쓰여 있었다.
이 노래의 작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느낀 천황은 즉시 그 집을 찾게 하였고, 그 집의 주인은 바로 가인으로 유명한 기노 쓰라유키(紀貫之)의 딸 기노 나이시(紀内侍)였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 기노 나이시는 아버지가 손에 넣은 그 홍매화나무를 아버지라 여기며 매우 아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천황은 「이거 짐이 참으로 미안한 짓을 하였도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오우슈바이의 노래는 칙찬(勅撰)으로 편찬된 와카 모음집 『拾遺和歌集』에도 수록되었다(雑下・よみ人知らず).
가계도
황후 : 중궁(中宮) 후지와라노 안시/야스코(藤原 安子) (927~964) -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 師輔)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