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인 1946년 이전까지는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 부지의 일부였으며, 1946년경부터 시작된 전후개척에서 어료목장 부지 중 일부가 농지로 개방되었고, 이런 현유림의 일부였던 토지가 매각되며 개척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만들어졌다.[15] 이 때 당시 이주한 당시 정착민들은 신궁민(新窮民)이라고도 불렸는데, 패전으로 인해 식민지에서 쫓겨난 히키아게샤, 오키나와 전투로 황폐해진 이후에 미국의 통치에 놓여 귀향할 수 없게 된 오키나와현 출신자, 장남이 아니라 가독을 잇지 못한 농가의 차남 이하 아들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1][14] 불하 가격은 단당 80엔(쇼트피스 2통 상당) 정도였다.[16]
↑경작지를 둘러싸고 임대차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공항공사 측의 소송과 기타하라파 농민의 이의 소송이 있었으나 모두 기타하라파 농민의 패소가 확정된 상태이다.[7][8] 공안조사청은 기타하라파의 농지가 비록 미미하지만 2기 지구 내에 존재하는 것들은 중핵파를 비롯한 기타하라파 지지 세력에게 산리즈카 농민을 지원한다는 "매우 훌륭한 명분"이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