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크라이나 총선은 2014년 10월 26일 우크라이나의 최고 라다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열린 조기선거이다. 2014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트로 포로셴코가 당선된 이후 포로셴코는 줄곧 조기 총선거를 추진했다.[1] 7월에는 집권하던 연립내각이 해체되면서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이 주어졌고, 2014년 8월 25일에는 의회 해산과 조기선거 개최를 발표했다.[2]
이 선거로 우크라이나 정치지형이 급변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집권당이었고 2006년부터 꾸준히 양당으로 많은 의석을 배출했던 지역당은 2014년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고 비공식적인 후계당인 야권전선은 9%의 득표율로 급감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원외정당으로 추락했다. 반면 2014년 7월 포로셴코 지지자들이 결성한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2014년 8월 바티키우시나에서 분당한 인민전선, 2012년 창당된 자조당, 2014년 9월 전 지역당 의원이 모여 창당한 야권전선 등 4개 신당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선거 이후 꾸려진 신의회는 2014년 11월 27일 개회했다.[4] 같은날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인민전선, 자조당, 바티키우시나 5개 당이 모여 "유럽 우크라이나" 회파를 결성했다.[5] 12월 2일에는 아르세니 야체뉴크 총리를 중심으로 야체뉴크 제2내각이 결성되었다.[6]
배경
2011년 11월 개정된 선거법에 따르면 최고 라다는 최소 매 5년마다 열려야 했다.[7][8] 이 법은 2012년 우크라이나 총선과 동시에 발효되었다. 만약 조기선거가 없었다면 다음 총선은 2017년 10월 29일에 열릴 예정이었다.[7] 하지만 2014년 5월 25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페트로 포로셴코는 당선 직후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1]유럽 평의회 입법회의 6월 26일 회의에서는 포로셴코가 다음 총선을 2014년 10월에는 열기를 바란다면서 이를 "가장 민주적인 길"이라고 말했다.[9][a]
유로마이단 운동과 뒤이은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의 여파로 결성된 야체뉴크 제1내각은 7월 24일 해산되었다.[11] 만약 30일 이내에 새로운 연정내각이 수립되지 않는다면 포로셴코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열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11] 내각 해산과 동시에 주권유럽 우크라이나 회파는 2014년 9월 28일에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12]
8월 14일 우크라이나 텔레비전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은 자칭 분리를 선언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며 조기총선을 정당화했다.[13]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 있는 두 공화국은 각각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에서 분리되었으며 돈바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와 교전하고 있다.[14] 포로셴코는 "그 전체 파벌에서 많은 의원이 해외 [러시아]에서 통제받고 있는 '제5열'이 가득한 의회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13] 또한 포로셴코는 조기총선이 "의회 뿐 아니라 정계를 정화하는 가장 최고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포로셴코는 8월 25일에 2014년 10월 26일 조기총선을 실시해야한다고 촉구했다.[2][15] 동시에 말한 텔레비전 연설에서 포로셴코는 "[전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주축인 의회를 정화"하는데 필요한 선거라고 말했다. 또한 "이 의원들은 선출한 우크라이나 국민을 대표하지 못한다"라고도 말했다.[16] 또한 이들 의원은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2014년 1월의) 독재법 제정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16] 그러면서 (당시) 현직 의원 중 대다수가 "무장세력/분리주의자의 직접적인 후원자거나 공범, 최소한 동조자"라고 말했다.[16]
선거제
최고 라다 의원 정수는 450명이 5년 임기제로 1인 2투표제로 선출되는데, 225명은 단순(FPTP) 소선거구제로 선출되며, 225명은 전국단일명부 폐쇄명부식비례대표제로 최대잉여방식을 사용해 최소 정당지지율이 5%를 넘어야 선출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17] 1998년에서 2007년까지 이뤄졌던 선거와는 달리 정당이 선거블록을 구성할 수 없다. 공개명부식비례대표제와 선거블록식 선거제로 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18]
225개 선거구로 나누는 방식은 2012년 우크라이나 총선과 동일하다. 이 중 198개 선거구에서만 선거가 열렸다.
미선거 지역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은 선거를 열 수 없었다. 특히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에서 크림 자치 공화국의 10개 선거구, 세바스토폴의 2개 선거구는 선거가 전부 미실시되었다. 돈바스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선거가 열리지 않았다. 민주감시단체인 OPORA에서는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에서 180만명, 도네츠크주에서 160만명, 루한스크주에서 120만명 등 총 460만명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19]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전체 유권자수의 약 5%를 차지하는 약 180만명의 유권자가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에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4년 3월 크림 위기 당시 크림반도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그 이후로 크림반도에서는 합법적인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2014년 총선에서도 크림반도의 유권자들은 전국단일선거구식 정당명부제 비례투표에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투표할 수 있었으나 단일소선거구에서 후보에게 투표할 순 없었다.[20]
돈바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의 가장 동쪽에 있는 2개주 도네츠크, 루한스크를 가리키는 지역명이다. 약 5백만명의 유권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전체 유권자수의 약 14%를 차지한다. 2014년 여름부터 가을 휴전까지 돈바스에서 격렬한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돈바스의 약 절반은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는 분리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선거 전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CEC)는 점령지역에서 총선을 진행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3] 따라서 돈바스 32개 선거구 중 8개 선거구에서만 본투표가 전부 진행되었다. 나머지 중 9개 선거구에서는 우크라이나 정부 통제지역과 비통제지역으로 나누어 일부 지역에서만 투표를 할 수 있게 진행했다. 이 중 2개 선거구에서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투표소를 열 수 있어 제53선거구에서는 유권자의 9%만, 제45선거구에서는 유권자의 2%만 투표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선거구의 소선거구제 선거는 인정받아 당선자인 각각 올레흐 네다바, 유힘 즈뱌힐스키는 의원이 되었다. 나머지 15개 선거구에서는 투표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점령된 영토 지역에서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11월 2일 소위 자체 총선을 진행했는데 민스크 협정에 따라 이 선거는 불법화되었고 국제사회에서는 돈바스의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다.[21]
선거 운동
225개 선거구에서 총 3,321명의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으며, 이 중 2,018명이 무소속 후보였다.[22] 총 52개 정당이 후보를 지명했다.[22] 10월 1일 후보 등록 마감일 이후 총 147명의 후보가 사퇴했다.[23]
선거 운동 기간에 대외관계와 돈바스 전쟁에 대한 각 정당별 입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24] 하나는 무력 사용으로 돈바스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친유럽계 정당으로 바티키우시나, 시민의 지위, 급진당, 인민전선(이 당은 무력 사용에 대해 애매한 자세를 취함) 등이 있었다.[24]스보보다도 적극적인 무력 사용으로 돈바스 전쟁 종식을 요구했다.[24]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은 평화적인 해결책으로 돈바스 전쟁 종식을 원한 유일한 친유럽계 정당이다.[24] 또 다른 종류는 강한 우크라이나와 야권전선을 주축으로 한 친러 계열로 돈바스 전쟁을 평화적 해결책으로 종식시키기를 원했다.[24]우크라이나 공산당은 "분리주의 계열 반란을 효율적으로 지원하자"라고 주장했다.[24]
9월 2일 우크라이나 민주개혁동맹(UDAR) 원내대표 비탈리 코발추크는 자당과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이 2014년 3월 29일 "총선공동참여선언"에 합의한 이후부터 두 당이 이번 총선을 앞두고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지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9월 15일에는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의 비례정당명부 중 30%가 UDAR 소속으로 채워질 것이며, 명단 제1후보에는 비탈리 클리치코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클리치코는 자신은 키이우 시장에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27][28]
9월 7일 열린 시민의 지위 당대회에서는 민주동맹과 함께 부분적인 선거연합을 맺어 비례명부에 같이 하나의 명부로 같이 출마하기로 결정했다.[29]
지난 2012년 총선에서 제1당이었던 지역당은 돈바스의 모든 주민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어 선거의 정당성이 부족하다며 총선 출마를 거부했다.[31] 지역당에서 총선에 나가기로 결정한 개별 의원은 야권전선 후보로 출마했다.[32] 당 비례대표명부를 작성한 유리 보이코는 야권전선은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개별 정치인들이 모인 '정치집합체'라고 말했다.[32]
2014년 우크라이나 총선은 공인된 2,321명의 해외 옵서버가 감독했다.[33] 이 중 304명은 21개국의 대표로 왔으며 2,017명은 20개 국제조직에서 옵서버로 방문했다.[33]
우크라이나의 민주감시단체인 OPORA은 선거는 합법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돈바스 지역의 전투로 인해 "선거운동이 국가 한계 내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34]NGO인 우크라이나 유권자 위원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게 "중대한 선거부정이 다수 발견되었다"며 45번과 102번 선거구의 선거결과를 무효처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34]
당시 개표가 상당히 지연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모든 투표용지는 11월 10일에만 개표되었다고 설명했다.[35] 제38선거구의 결과는 법정에 선거 결과 이의제기가 들어와 11월 중순까지 발표가 연기되었다.[36]
투표자수는 2012년 20,797,206명에서 2014년 16,052,228명으로 감소했다.[37]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일부 지역에서 투표가 진행되지 않아 생겼다. 이 때문에 공식 투표율은 선거가 열린 지역에서 거주하는 인구수만 가지고 나누어 계산했다. 이 계산식에 따르면 선거 가능 총 인구수는 30,921,218명이다.[37] 따라서 2014년 총선의 공식적인 투표율은 51.91%이며, 이는 2012년 57.43%에 비하면 소폭 줄어든 수치이다.
투표율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가장 높은 투표율(65-70%)를 보인 지역은 우크라이나 서부(자카르파탸주와 체르니우치주 제외)였으며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은 평균인 54-58%를, 남부와 동부는 비교적 낮은 40-48%를 보였다. 돈바스의 2개주, 정확히 선거가 열린 지역에 한해 계산한 투표율은 32%로 우크라이나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38]
이전까지는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인 지역이었다. 동부연구센터의 타데우즈 올잔스키에 따르면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전까지 동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지역당이 인위적으로 그동안 투표율을 높였던 것이라고 밝혔다. 2014년 선거는 이러한 인위적인 투표율 상승 유도가 사라진 결과라고 해석했다. 돈바스와 기타 동남부 지역의 투표율이 낮았던 또 다른 이유로는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에 없다고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 경우도 있다.[39]
선거구.^ 선거구는 행정구역과 동일하지 않으며, 하나의 선거구가 여러 도시, 마을, 지역 등 여러 개의 하위 행정구역을 포괄할 수 있다.
보궐선거
2015년
2015년 7월 26일에는 제205선거구(체르니히우 지역)에서 보궐선거가 열렸다.[45] 2014년 선거에 당선되었던 발레리 쿨리히가 체르니히우주의 주지사로 임명되어 의원직을 내려놓아 열렸다.[45] 이 보궐선거에는 총 91명이 후보로 등록했는데 그 중 8명이 정당에서 경선을 통해 지명된 후보였고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나온 무소속 후보이다.[45] 선거 당일 투표용지는 약 1 m까지 길어졌다.[45] 선거 직전까지 총 36명의 후보가 사퇴했다.[45] 선거 운동 기간에는 지지율이 가장 높던 헨나디 코르반과 세르히 베레젠코 두 후보가 유권자 매수, 상호 네거티브 선거 운동, 기타 여러 선거법 위반에 관련된 추문에 휩싸였다.[46]
선거 결과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정당 후보의 베레젠코가 35.90%의 지지율로 승리했다.[44] 그 다음으로 많은 득표를 기록한 후보는 UKROP의 코르반 후보로 14.76%를 기록했다.[44] 공식 투표율은 35.3%로 집계되었다.[47]
2016년
2016년 7월 17일 보궐선거에서는 제23, 27, 85, 114, 151, 183, 206선거구 등 총 7개 소선거구에서 치러졌다. 제23선거구에서는 2014년 당시 당선된 의원이었던 이호르 예레메예우의 사망으로 열리며, 나머지 선거구는 2015년 우크라이나 지방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한 선거구의 보궐선거이다.[48] 투표율은 약 50%에서 20% 미만까지 다양했다.[49] 2016년 보궐선거는 총 57명의 국제 옵서버의 감독 하에 치러졌다.[50]
제114선거구(스타니차루한스카 지역)에서는 선거위원회의 여러 위원이 개표를 거부하여 집계가 중단되었다.[51] 같은 선거구에서 선거법 위반에 대한 총 14건의 형사재판이 열렸다.[52] 제151선거구에서는 7월 21일에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