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11월 4일부터 11월 6일까지 일제강점기 조선경기도경성부에서 개최된 전국체육대회이다. 1920년 7월 13일에 발족한 조선체육회의 첫 행사로,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했다.[2][3] 광복 후 대한체육회는 조선체육회의 창립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으로 삼아, 이 대회를 제1회 전국체육대회로 인정하여 오늘날까지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되고 있다.[4][5][6][7][8] 단일 종목으로 개최되었으며 종목은 야구이다.
대회 준비
조선체육회는 1920년 6월 16일에 열린 발기를 위한 준비 모임을 거쳐 1920년 7월 13일에 창립되었다.[9][10] 조선체육회 창립을 주도했던 인물들 중 야구인이 많았고, 조선체육회가 1915년 일본오사카시에서 개최된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 사용한 야구 경기 규칙, 대회 운영 요강, 경기기록부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료들을 참고하여 야구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창립 후 가장 첫 대회를 야구 대회로 준비했다.[2] 대회 준비와 체육회 운영을 위해 조선체육회 간부들이 돈을 내놓고 사회의 주요 인물, 기업, 상점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1]
조선체육회는 3·1 운동이 발생하기 전까지 야구 경기가 자주 열렸던 훈련원에 있는 광장은 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용할 수 없어 당시 야구 경기를 개최하기에 가장 적합했던 경기장이었던 용산철도국 야구장을 비롯하여 경성중학 운동장,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 등 대회에 사용할 경기장을 물색했다.[1]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운동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내줘 조선체육회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5]
대회를 개최하기 전 경기 입장료를 받는지에 대해 조선체육회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다.[1] 입장료를 받으면 안 된다는 이사진과 학교 관계자의 의견이 많았지만, 조선체육회의 유지 및 운영을 기부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체육회의 원만한 유지와 운영을 위해서는 입장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경기 입장료를 성인 10전, 어린이 5전으로 책정했다.[5] 대회 수입은 예상보다 많은 약 200원 정도에 이르렀다.[5][11]
대회 진행
1920년 전국체육대회는 야구 종목만 진행되었으며, 1920년 11월 4일부터 11월 6일까지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2개 세부 종목으로 개최되었다.[1][12][13][14][15] 개회사는 조선체육회 이사장인 고원훈이 했고, 신홍우, 이원용, 현홍운이 심판을 맡아 대회가 진행되었다.[1] 야구 중학부 종목은 1920년 11월 4일 오전 9시부터 예선 경기가 시작되고 같은 날 오후에 결승 경기가 진행되었고, 야구 청년부 종목은 1920년 11월 5일 오후 1시에 예선 경기가 열리고 1920년 11월 6일 오후 1시에 결승 경기가 진행되었다.[3] 대회 방식은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미리 대진표를 정하지 않고 예선 경기 후 추첨을 통해 다음 라운드 대진이 정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
야구 중학부는 경신학교 야구단, 배재고등보통학교 야구단, 보성고등보통학교 야구단, 중앙고등보통학교 야구단, 휘문고등보통학교 야구단 등 5개 선수단이 참가했으며, 야구 청년부는 경신구락부 야구단, 배재구락부 야구단, 삼한구락부 야구단, 중앙청년회 야구단, 천도교청년회 야구단 등 5개 선수단이 참가했다.[1] 야구 중학부에서는 배재고등학교가 우승했고, 야구 청년부에서는 배재구락부가 우승했다.[16] 그런데 대회 이후 오늘날까지 발간된 자료에서 일부 경기 기록은 대회 당시에 언론에 보도된 경기 결과와 일부 차이가 있다.[16] 대회 당시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야구 중학부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가 결승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상대로 2:1로 이기며 우승하고, 야구 청년부에서는 배재구락부가 결승에서 천도교청년회를 이겨 우승을 달성했다.[16] 대회 이후 대한체육회에서 발간한 《대한체육회 50년》, 《대한체육회 70년사》, 《대한체육회 90년사》와 대한야구협회가 발간한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야구 중학부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가 경신학교를 결승에서 4:2로 이겨 우승하고,[17] 야구 청년부에서는 결승에서 배재구락부가 경신구락부를 이기고 우승했다.[1][18]
대회 이후
이 대회에서 야구 청년부에서 우승한 선수단인 배재구락부에 청년단 야구대회 우승기를 수여했다.[19][20] 이 우승기는 상단 부분에 '청년단야구대회'(靑年團野球大會)가, 하단 부분에는 주최 단체인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월계수와 우승을 상징하는 '우'(優)가 새겨져 있는 형태였다.[21] 이 우승기는 가장 첫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단에게 수여된 우승기로,[21]대한민국의 근대 체육사에 의미있는 우승기라는 점이 인정되어 2012년에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이 우승기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22]
2019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청은 제1회 전국체육대회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이 대회가 열렸던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 터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열었다.[23][24][25]
한편, 대회 이후 대한체육회에서 발간한 《대한체육회 50년》, 《대한체육회 70년사》, 《대한체육회 90년사》와 대한야구협회가 발간한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1회전에서 경신구락부 야구단이 천도교청년회 야구단을 상대로 4:0으로 승리하고, 배재구락부 야구단이 중앙청년회 야구단을 상대로 12:0으로 승리한 후, 2회전에서 배재구락부 야구단이 삼한구락부 야구단을 상대로 4:0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8] 그리고 결승에서 배재구락부 야구단이 경신구락부 야구단을 이기며 우승을 달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8] 이에 대하여 대한체육회가 발간한 《대한민국 체육 100년》에서는 대회 당시 《매일신보》가 보도한 경기 결과와 이후 발간된 자료의 차이점을 명시하고, 대회 이후 발간된 각종 자료에 일부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했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