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에 개최된 제1회 전조선소년야구대회에서 발생한 난동 사건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가 제재를 받아 배재보통고등학교 선수단의 참가가 불가능하고 경기장 시설이 좋았던 배재보통고등학교 운동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경기장 시설이 매우 열악했던 당시 배재보통고등학교에 대한 제재는 특정 학교와 선수단에 대한 징계를 넘어서 당시 한국 체육계의 경기장 이용에 불편을 초래했고 스포츠 강호를 배재한다는 것은 대회의 경기 수준 향상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결국 조선체육회의 이사회 결의와 7개 학교 교장들의 태도 완화로 1922년 9월 21일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대한 징계가 해제되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대한 징계 해제로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할 수 있게 되었고 배재 측 선수단 역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대회 진행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는 1922년 10월 14일부터 10월 17일까지 일제강점기 조선경성부에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이승훈의 시구를 시작으로 개최되었다. 중학부 종목에는 징계가 해제된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경신학교, 계성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숭실중학, 오산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등 8개 선수단이 참가했고, 청년부 종목에는 대구청년단, 반도구락부, 배재구락부, 숭실구락부, 연희전문학교, 중앙체육부 등 6개 선수단이 참가했다.
중학부 종목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가 결승에서 숭실중학을 5:2로 이기며 우승했고, 청년부 종목에서는 중앙체육부가 배재구락부를 12:5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3] 중학부 종목에서 우승한 배재고등보통학교 선수단에게 당시 후원사인 동아일보가 일본도쿄에서 재료를 들여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자수를 놓아 만든 우승기를 수여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