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리그(영어: Pacific League, 일본어: パシフィック・リーグ 또는 약칭 パ・リーグ 파 리그[*])는 일본에서 운영되고 있는 두 개의 프로 야구 상위 리그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에 기존 단일 리그에서 두 개의 리그로 분리될 당시 새 구단 가맹을 찬성하였던 팀을 비롯해 7개 팀으로 창설되었다. 센트럴 리그와는 달리 퍼시픽 리그가 주관한 경기에서는 지명 타자 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일본 프로 야구 조직 퍼시픽 리그 운영부(日本プロ野球組織 パシフィック・リーグ運営部)이며 또는 약칭 파 리그(パ・リーグ)라고 불린다.
1950년에 새 구단의 가맹 문제를 두고 시비가 생겨 일본 야구 연맹이 분열됐을 당시 가맹을 찬성하였던 난카이 호크스(南海ホークス, 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도큐 플라이어스(東急フライヤーズ, 현재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다이에이 스타스(大映スターズ 후의 다이에이 유니온스), 한큐 브레이브스(阪急ブレーブス, 현재의 오릭스 버펄로스)와 새 구단인 마이니치 오리온스(毎日オリオンズ, 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스), 긴테쓰 펄스(近鉄パールス, 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니시테쓰 클리퍼스(西鉄クリッパース, 현재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가세하여, 도합 7개 구단으로 태평양 야구 연맹(太平洋野球連盟)이 발족됐다.
1950년대: 여명기
이 시대에는 난카이와 니시테쓰의 황금 시대로, 양자의 대결은 ‘황금 카드’라고까지 불리면서 1959년에는 센트럴 리그와의 관객 동원수를 놓고 경쟁했던 적도 있었다. 그 한편으로는 홀수 구단에 의한 경기 일정의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 1954년 시즌 개막 전에는 다카하시 유니온스(高橋ユニオンズ)[1]가 연맹에 가입하여 8개 구단이 됐다. 다카하시 유니온스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 연속으로 시즌에 참가한 후에 1957년 2월 다이에이 스타스와 합병되어(다이에이 유니온스로 변경) 7개 구단이 됐다. 여기에 1957년 시즌 종료 후 다이에이가 마이니치와 통합이 되면서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毎日大映オリオンズ), 통칭 다이마이(大毎) 오리온스가 되어 6개 구단으로 감소하였다. 1980년에 들어와 연맹의 이름이 현재의 퍼시픽 야구 연맹(パシフィック野球連盟)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쇠퇴기
1960년대의 텔레비전 보급은 텔레비전 방송국과 관련된 회사를 갖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중심으로 센트럴 리그의 인기를 높였지만, 대중 매체를 모체로 갖고 있지 않는 퍼시픽 리그에는 역풍을 맞았다(마이니치 신문은 1960년 11월에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경영에서 손을 뗐다). 그런 가운데 다이마이의 구단주가 된 나가타 마사이치는 사재를 털어 1962년 도쿄 미나미센주에 ‘도쿄 스타디움’을 완성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시픽 리그의 활성화에는 갈 길이 멀어보였다.
1970년대: 암흑 시대
1969년 시즌 종료 후에 발생한 검은 안개 사건은 니시테쓰 라이온스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주면서 퍼시픽 리그 전체의 이미지가 추락했다(니시테쓰는 1972년에 라이온스를 나카무라 나가요시에게 인수하여 매각). 또 영화 산업의 쇠퇴로 인해 구단을 지원하는 경영 능력이 없어지면서 다이에이(나가타 마사이치 → 나카무라 나가요시) → 롯데, 도에이 → 닛타쿠홈 → 닛폰햄과의 구단 매각이 잇따랐다(1973년 일본 프로 야구 재편 문제를 참조). 그리고 1975년에는 퍼시픽 리그의 관객 동원수가 센트럴 리그의 약 3분의 1에까지 침체됐다. 퍼시픽 리그 관계자는 이 침체를 타파하기 위해 2시즌제 채택(1973년 ~ 1982년), 지명타자 제도 채택(1975년 ~ 현재) 등 여러 가지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퍼시픽 리그의 침체상은 컴퓨터 게임에도 반영돼 닌텐도가 1983년에 발매한 베이스볼의 경우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 수 있다.
1978년, 니시테쓰로부터 인수를 받았지만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던 나카무라 나가요시로부터 라이온스를 인수한 세이부 그룹은 구단 경영에 혁명을 일으킨다. 메이저 리그와 같은 수준이라고 한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의 건설, 팬 서비스의 충실, 돈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선수 보강 등의 그러한 시책들이 공을 세워 많은 관중이 몰려들어 1980년대에는 5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해(1982년 ~ 1983년, 1986년 ~ 1988년) ‘야구계의 신 맹주’라고까지 불리게 된다. NHK 뿐만 아니라 민영방송사도 요미우리 경기 일변도로부터 세이부의 경기도 방송하게 되었다. 또 그 무렵에는 기요하라 가즈히로, 아와노 히데유키, 니시자키 유키히로 등 간판 선수들이 퍼시픽 리그에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게 됐다.
그 한편으로 같은 철도사업자인 난카이와 한큐는 “프로 야구단을 가지는 사명은 끝냈다”라고 선언하여 다이에와 오릭스에 매각을 단행했다. 또 1980년에 명칭을 퍼시픽 야구 연맹(パシフィック野球連盟)으로 변경했다.
1990년대: 이치로 & 돔 구장 시대
1994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이치로는 1시즌 200개의 안타를 넘는 대활약으로 팬들의 인기를 모았다. 또 이치로가 소속된 오릭스도 1995년에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부흥의 상징으로서 팬들로부터의 후원도 있어 1995년과 1996년에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치로 뿐만 아니라 노모 히데오,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 간판급 선수들이 데뷔했던 것도 요즘이다. 또 1990년대는 후쿠오카 돔, 오사카 돔, 세이부 돔 등 퍼시픽 리그의 홈구장들이 잇따라 돔 구장이 되면서 닛폰햄을 포함하면 6개 구단 가운데 4개 구단이 돔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됐다. 이러한 상승 효과에 의해 퍼시픽 리그의 관객 동원 수가 늘어나면서 센트럴 리그의 70%대에까지 상승하게 된다.
2000년대: 지역 밀착 & IT시대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일본 시리즈 우승과 이듬해 2000년에도 리그 연패를 달성하는 등 ‘지역 밀착 구단’의 성공한 사례로서 야구계에 큰 임펙트를 주었고 이것이 그 후 닛폰햄이 지역 밀착형 구단을 목표로 해서 홋카이도에 이전하는 큰 계기가 됐다(이전과 함께 구단명도 ‘홋카이도’가 붙여졌다). 단지 요즘에는 아직 지역 밀착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고 롯데도 1992년에 가나가와현가와사키시에서 지바현으로 이전한 후에 구단명도 ‘지바’를 붙이는 등 특단의 조치는 있었지만 오랜 세월의 침체로 인해 관객 동원수도 부진했다.
지역 밀착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2004년 6월에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이 돌연 발표됐다. 이 일로 인해 일시적으로 리그 존속에 위기를 맞이하는 상황으로 치달았으나 라쿠텐(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과 라이브도어(센다이 라이브도어 피닉스)가 리그의 신규 참가에 나서 같은 해 11월 2일 구단주 회의의 결과 라쿠텐의 참가가 결정됐다(2004년 일본 프로 야구 재편 문제를 참고). 이로 인해 2005년 시즌 이후에도 6개 구단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참고로 센트럴 리그의 주요 구단이 경영 주체의 바뀜없이 계속 이어온 것에 반해 퍼시픽 리그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소멸에 의해 퍼시픽 리그의 창설된 이래 구단 운영 회사의 교체를 겪지 않은 구단은 신생 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유일하다.
퍼시픽 리그의 각 구단은 이 반성을 교훈삼아 여러 가지의 지역 밀착 방침을 내세웠다. 이미 가와사키에서 지바로 이전돼 있었지만 관객 동원수가 부진한 지바 롯데 마린스는 행정 측과 협력해 지바 마린 스타디움의 ‘볼파크화 구상’을 본격적으로 내세웠고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나 독특한 구단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등 2005년에는 31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5년 후인 2010년에도 다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도쿄 돔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시절 관객 동원수에 침체를 겪고 있던 닛폰햄은 2004년에 지금까지 프로 야구 구단이 없었던 홋카이도에 연고지를 이전했다. 애초에 홋카이도에서는 오랫동안 요미우리전 중심이 된 TV 중계의 영향도 있어 요미우리팬층이 압도적으로 많아 새로운 팬을 확보하기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현지 언론과 지방 자치 단체의 지원을 시작으로 연고지 이전한 후의 구단과 감독, 그리고 선수들에 의한 팬 확보의 노력에 의해 기존 야구 팬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야구에 관심이 없었던 여성층과 다양한 연령층을 겨냥하여 팬의 정착화에 성공했다.
연고지 이전을 계기로 불과 3년 만에 오랫동안 멀어지고 있었던 리그 우승과 동시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이듬해 2007년에는 리그 연패를 달성하여 근년에 우승 경쟁에도 가세하는 등 비약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당시 다이에와 지바 롯데 등에 이어 닛폰햄이 프로 야구 구단이 없었던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경지를 열었고 결과를 낸 것에 의해서 프랜차이즈 구단이 지역에 가져오는 효과나 구단에 가져온 변화 등 지역 밀착 스타일이 최대의 이슈로 다시 떠오르게 됐다. 또, 2005년에는 라쿠텐이 참가하면서 경영진이 쇄신된 세이부는 2008년부터 구단명을 ‘사이타마’로 내걸어 사이타마현내에서 주최 경기를 실시하는 등 지역 밀착에 대한 자세를 밝혀 새로운 지역 밀착형 리그로서의 형태가 확립됐다. 2005년부터는 센트럴 리그와의 교류전을 시작했다.
2009년 1월 1일에 개정된 일본 프로패셔널 야구 협약 발효에 의해 연맹 사무국과 직하의 심판부·기록부는 커미셔너 사무국, 센트럴 리그 사무국과 통합되어 커미셔너 직속의 ‘심판부’, ‘기록부’, ‘퍼시픽 리그 운영부’가 되면서 리그 회장직은 폐지됐다(센트럴 리그와는 같이 ‘센트럴 리그 운영부’가 있다).
2010년대
이하는 실제 수로 발표된 2005년 이후의 페넌트레이스(리그전+센트럴·퍼시픽 교류전) 주최 경기(홈 경기)에서 한 경기당 평균 관중수(사람/경기)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2] 2017년 시즌에는 평균 관중수의 상위 3팀이 삿센히로후쿠(지방 중추 도시)에 소재하는 지방 구단(★)으로 하위 3팀이 3대 도시권에 속하는 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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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의 경우에는 시간, 횟수 제한 없음(주간 경기의 경우 일몰까지)
더블헤더 1차전의 연장은 원칙적으로 12회. 단, 야간 경기(황혼녘 포함)는 9회까지.
1952년
변칙 더블헤더 1차전은 9회까지. 나머지는 시간, 횟수 무제한
1953년
싱글로 열리는 주간 경기의 경우에는 시간, 횟수 무제한(일몰까지, 이후 1970년까지 동일함).
변칙 더블헤더 1차전은 12회까지. 야간 경기는 23시 45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음.
1954년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 12회까지(횟수 제한은 1958년까지 동일함).
야간 경기는 22시 45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음.
1955년 ~ 1958년
야간 경기는 22시 15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음.
1959년 ~ 1960년
더블헤더 1차전은 9회까지(연장전 없음).
야간 경기는 22시 30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시간 제한은 1964년까지 동일함).
1961년 ~ 1964년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 12회까지(횟수 제한은 1965년에도 동일함).
1965년
야간 경기는 22시 15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시간 제한은 1967년까지 동일함).
1966년 ~ 1967년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 11회까지.
1968년 ~ 1970년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 12회까지.
야간 경기는 22시 20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1971년 ~ 1973년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 11회까지.
그 외의 경기(더블헤더 2차전 포함)는 경기 시작 3시간 20분이 경과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단, 이하의 규정이 있다.
(1) 19시 이후에 시작되는 경우에는 경과 시간에 상관없이 22시 20분을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2) 9회를 채우지 못하고 시간 제한에 걸린 경우에도 9회까지는 반드시 경기를 치른다.
1974년 ~ 1987년
더블헤더 1차전은 9회까지.
그 외의 경기는 원칙적으로 경기 시작 3시간이 경과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단, 이하의 규정이 있다.
(1) 19시 이후에 시작되는 경우에는 경과 시간에 상관없이 22시를 지나면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2) 9회를 채우지 못하고 시간 제한에 걸린 경우에도 9회까지는 반드시 경기를 치른다.
1988년 ~ 1989년
더블헤더 1차전은 9회,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연장 12회까지. 단, 이하의 규정이 있다.
(1) 경기 개시(개시 시각과 무관)로부터 4시간이 경과했을 경우에는 12회를 채우지 못했더라도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2) 9회를 채우지 못하고 시간 제한에 걸린 경우에도 9회까지는 반드시 경기를 치른다.
1990년 ~ 1993년
연장 12회까지. 단, 이하의 규정이 있다.
(1) 경기 개시(개시 시각과 무관)로부터 4시간이 경과했을 경우에는 12회를 채우지 못했더라도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2) 9회를 채우지 못하고 시간 제한에 걸린 경우에도 9회까지는 반드시 경기를 치른다.
1994년 ~ 2010년
연장 12회까지 시간 제한은 없음
2011년 ~ 2012년
연장 12회까지. 단,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절전 대책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1) 경기 개시로부터 3시간 30분(우천 등에 따른 중단 시간도 포함)이 경과했을 경우에는 다음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
(2) 9회를 채우지 못하고 시간 제한에 걸렸을 경우라도 9회까지는 경기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