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리그(NL)에서 도루 부문 네 차례 1위와 득점 부문 두 차례 1위를 했으며, 네 차례 3할 5푼 이상의 시즌 타율을 기록했다. 1925년에는 26개의 3루타를 기록해 1900년 이후 한 시즌에서 두 번째로 많은 3루타를 쳐낸 선수로 기록되었다. 세 시즌에서 200개 이상의 안타를 쳐냈으며, 피츠버그 소속으로 192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통산 타율 .321를 기록했으며, 1968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2]
어린 시절
카이카이 카일러는 1898년 8월 30일 미국 미시간주해리스빌에서[1][3] 조지와 애나 카일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 조지와 애나는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며, 조지는 캐나다에서 세미 프로 야구 선수로 뛰었다. 조지와 애나의 윗 세대들은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할 때 캐나다로 이주했다가,[4] 1880년대에 미시간주로 다시 옮겨갔다.[5] 카일러는 학교에서 야구, 축구, 농구, 육상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학창 시절 내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지 않았다.[5]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웨스트포인트에 3개월 있다가[6] 미시간주 플린트로 돌아와 뷰익 모터스 조립 공장에서 일했다.[7] 카일러는 플린트와 디트로이트에서 경기를 치르는 인더스트리얼 리그에서뿐만 아니라 뷰익 공장 야구팀에서도 뛰었다.[8]미시간-온타리오 리그 소속의 베이시티 울브스는 1920년 카일러와 계약을 맺었다.[8] 그해 시즌 카일러는 타율 .317와 16개의 3루타를 기록했다.[8] 같은 해 9월에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카일러와의 계약을 사들였다.[8]
선수 경력
피츠버그 파이리츠
카일러는 세 시즌 동안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이따금 모습을 드러냈지만, 대부분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냈다. 1923년에는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내슈빌 볼스에서 뛰며 .340의 타율을 기록했다.[9] 카일러의 별명이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내슈빌에 있을 때였다. '카이카이(영어: Kiki)'라는 별명이 유래한 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설명에 따르면 카일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카이(영어: Cu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5] 내슈빌의 외야에 뜬공이 떴을 때 카일러가 이를 처리하기로 하면 유격수가 먼저 '카이'라고 외친 뒤 2루수가 이를 뒤따라 했고, 이렇게 경기장 안에서 울려 퍼진 이름이 내슈빌 팬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10] 두 번째 설명에 따르면 내슈빌의 감독이 타순을 외치면서 그를 부를 때면 성 카일러를 더듬으며 말했는데, 이걸 듣고 다른 선수들이 장난치며 따라 하다가 별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11]
카일러는 1924년 시즌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어 첫 풀타임 시즌을 치렀다.[12] 시즌 초반에는 카슨 빅비와 출전 시간을 나눠 가지며 플래툰으로 좌익수 포지션을 소화했다가, 5월이 끝난 시점에 13경기에 출전해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면서 주전 외야수로 발돋움했다.[8] 그해 8월 9일 경기에서는 3개의 2루타와 한 개의 3루타를 포함해 6안타를 쳐내며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팀의 16–4 대승에 기여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17경기 출전해 .354의 타율과 94득점, 32도루를 기록했다.[13] 과거 피츠버그의 감독이자 후일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리는 프레드 클라크는 "카일러는 제2의 [타이] 콥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14][주 1]
1925년 6월 4일, 카일러는 사이클링 히트와 함께[15][16] 한 개의 볼넷과 한 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필리스를 상대로 한 16–3의 대승을 도왔다. 8월의 한 경기에서는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크기가 작은 야구장으로 알려진 베이커 보올에서 2개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다.[14][17] 같은 해 9월 18일부터 20일까지는 10타수 연속 안타로 이 부문 내셔널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기도 했다.[14][18] 이해 시즌 모두 8개의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쳐냈으며, 144득점과 26개의 3루타로 이 부문 내셔널 리그 1위를 했고 .357의 타율로 개인 통산 두 번째로 3할 5푼 이상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이 부문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3] 또한 이해 시즌 기록한 369루타는 팀 신기록이었다.[14][19]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 워싱턴 세너터스를 상대했다. 카일러는 시리즈에서 타율 .269에 그쳤지만, 7차전에서 결승 2타점 2루타를 쳐내며[20] 팀의 7차전 9–7 승리를 이끌었다.[20] 이해 우승은 카일러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남았다.[3]
1926년 4월, 폴 워너가 파이리츠 선수단에 합류해 우익수 포지션을 꿰차면서, 카일러는 중견수와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다.[20] 이해 시즌 초반 카일러는 6월 11일까지 .381의 타율로 맹타를 휘둘렀으나, 남은 시즌 절반 동안은 .299로 하락세를 보였다.[21] 시즌 중반이던 8월 11일은 카일러와 소속 구단 파이리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날 베이브 애덤스, 카슨 빅비, 그리고 팀 주장이자 후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맥스 캐리는 프레드 클라크 부사장의 경기장 출입을 금지하기 위한 선수단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20] 하지만 투표 결과는 18–6으로 클라크 부사장을 벤치에 남기자는 의견이 우세했고, 투표를 주도했던 이 세 명의 선수들은 8월 13일을 기해 방출되었다.[22] 이후 남은 시즌 동안 피츠버그는 23승 24패를 기록했고, 카일러는 이 사건 이후 .288의 부진한 타격을 보였다.[1] 세 번째 풀타임 시즌이었던 이해 카일러는 .321의 타율과 함께 도루와 득점 부문에서 내셔널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렸다.[3]
1927년 5월 28일, 카일러는 발목 인대 파열로 3주간 결장했다. 선수 커리어 내내 겪게 될 수많은 부상 가운데 첫 번째 부상이었다.[1][23] 카일러는 1927년 시즌 내내 피츠버그에서 감독직을 맡은 첫해인 도니 부시와 갈등을 겪었고,[24] 8월 6일에는 병살 플레이를 막지 못해서 감독으로부터 50 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745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23] 그로부터 며칠 뒤에 외야 수비를 하다가 컷오프 맨에게 부정확한 송구를 한 뒤에는 감독의 지시로 이후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남은 시즌 동안 대부분 대타로 1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25]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카일러는 감독과의 갈등의 여파로 팬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에 단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23][26][27] 그해 11월, 카일러는 내야수스파키 애덤스와 외야수피트 스콧의 맞상대로 시카고 컵스에 트레이드되었다.[28]
시카고 컵스와 후반기 커리어
컵스 시절 카일러는 원래 포지션인 우익수를 소화했으며 타순에서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1928년 시즌, 발목 부상을 당해[1] .285의 타율에 그쳤으나 도루 부문에서 내셔널 리그 1위를 하며 통산 두 번째 도루 부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해 시즌 중에는 팀 동료 클리프 히스코트와 후일 명예의 전당 입성자 가비 하트넷, 핵 윌슨과 함께 사중창단을 만들기도 했다. 1949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코치로서 카일러가 지도했던 자니 페스키[1]는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어요. 항상 노래를 불렀어요. 샤워 중에, 라커룸에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29] 1929년 시즌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카일러는 1926년 이후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통산 세 번째로 도루 부문 리그 1위를 했으며 .360의 타율로 자신의 세 번째 3할 5푼 이상 시즌을 만들어냈다.[3]1929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해 시리즈에서 3할을 쳤지만, 소속팀 시카고 컵스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30]
1930년 시즌, 카일러는 안타(228), 득점(155), 타점(134)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고, 통산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도루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다.[3] 메이저 리그 기록인 191타점을 올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핵 윌슨이 이끌었던 시카고 컵스는 페넌트 우승을 놓치고, 1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두 경기 차 뒤진 2위를 했다. 1931년 시즌, 카일러는 통산 세 번째로 한 시즌에 200개 이상의 안타를 쳐내며 다시 성공적인 시즌을 만들어냈지만, 150경기 이상 출전한 시즌은 이해가 마지막이었다. 1932년 시즌 초, 카일러는 1루 베이스를 돌다가 왼발 발가락에 골절상을 입고 6주간 결장해야 했다.[1][31][32] 같은 해 8월 31일, 카일러는 자신의 프로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의 경기 중 한 경기로 불릴만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먼저 이날 5–4로 뉴욕 자이언츠에게 한 점 차로 끌려가고 있던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이날의 네 번째 안타이자 동점을 만드는 안타를 때리며 경기를 연장으로 이끌었다. 이어 10회초에 뉴욕 자이언츠가 다시 4점을 추가하고 10회말에 시카고 컵스의 첫 두 타자가 차례로 아웃 되면서 승리의 추가 기울어지는 듯했으나, 2아웃 상황에서 카일러의 팀 동료 마크 코에닉의 솔로 홈런과 세 타자 연속 단타가 이어지며 점수는 9–7이 되었다. 그리고 주자 두 명이 나간 상황에서 다음 차례에 타석에 들어선 카일러는 경기를 끝내는 쓰리런 홈런을 터뜨렸다.[32] 이날 카일러는 6타수 5안타에 5타점을 올리는 대활약을 펼쳤다.[33]
시범 경기 중이던 1933년 3월 29일, 카일러는 도루 시도를 하면서 베이스에 슬라이딩을 하던 도중 종아리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1][24][32] 이로 인해 그해 7월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출전이 줄어든 그해 .317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으나, 30대 중후반에 접어든 나이와 그동안의 부상 이력 때문에 70경기에 출전해 도루 4개에 그치는 등 그의 주특기였던 빠른 발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음 시즌인 1934년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140경기에 출전해 .338의 타율, 42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3] 1935년에는 시즌 전반기에 .268의 타율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1][3] 시즌 중도에 팀에서 방출되는 아픔을 겪었다.[34]자유 계약 신분이 된 카일러는 그해 7월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3] 신시내티에서의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36년, 카일러는 144경기에 출전해 .326의 타율과 185안타를 기록했고, 1930년의 37도루 이후 가장 많은 16개의 도루를 해냈다. 1937년 시즌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광대뼈 골절을 당해 시즌 중 출전 경기 수가 117경기로 줄어들었으며,[35] 11경기에만 출전했던 1923년 시즌 이후 처음으로 무홈런 시즌을 보냈다. 그해 10월 신시내티에서 방출되었고,[35] 카일러는 은퇴를 결심했다.[1] 하지만 다음 시즌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해 마지막 한 시즌을 뛰게 되었는데, 이해 내셔널 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3] 1938년 시즌 58경기에 선발 출전했고, 9월 16일에 선수로서는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은 시즌 동안 팀에서 코치 역할을 맡았다.[1]
말년과 평가
카일러는 선수로서 은퇴한 뒤에 마이너 리그 팀의 감독을 맡았다. 1939년 시즌에 조 엥겔 휘하에서 미국에서 몇 안 되는 팬이 소유한 구단 중 하나였던 채터누가 룩아웃츠의 감독을 맡아 서던 어소시에이션의 정규 시즌 페넌트 우승을 이끌었다. 이어 시카고 컵스(1941~1943)와 보스턴 레드삭스(1949)에서 코치를 맡았으며, 1950년 시즌의 개막을 앞두고 보스턴의 3루 코치를 맡기로 했다.[36] 하지만 그해 2월 2일에 미시간주글레니에서 얼음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 마비가 일어났다.[37] 이어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다리에 혈전이 발생했고,[1] 상태가 악화하여 2월 11일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사망했다.[38] 시신은 미시간주 해리스빌타운십에 있는 세인트 앤 공동묘지에 묻혔다.[39]
카일러는 통산 타율 .321, 2,299안타, 2루타 394개, 3루타 157개, 128홈런, 1,065타점, 676볼넷, 328도루를 기록했다.[3] 세 시즌에서 200개 이상의 안타를 때렸고, 득점 부문에서 두 차례 리그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한 차례 6안타 경기, 다섯 차례 5안타 경기, 31차례 4안타 경기를 만들었는데, 4안타 경기 중 10차례는 1925년에 달성한 기록이었다.[40] 1930년 시즌에는 228안타와 155득점을 기록했는데, 이 두 기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카고 컵스 구단 역사상 각 부문 2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41] 또한 같은 해 기록한 50개의 2루타는 당시 이 부문 팀 최다 기록이었다.[41] 파이리츠 유니폼을 입고 뛰던 기간의 통산 타율 .336는 피츠버그 역대 3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1925년 시즌의 220안타는 당시 피츠버그 선수로서는 단일 시즌 최다 안타 타이기록이었다.[42] 또한 메이저 리그에서 10회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3]
카일러는 야구 선수 중에서도 예의 바르면서 수줍음이 많고 친절한 선수로 유명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조 크로닌은 카일러를 두고 "내가 야구계에서 만난 가장 훌륭하고 깨끗한 동료 중 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1925년에 파이리츠에 합류했을 때 카일러는 인정받는 선수였지만 언제나 기꺼이 도와주었어요."라고 말했다.[43] 《스포팅 뉴스》에서는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이 되는 선수"라고 일컬었다.[44] 카일러는 196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카일러의 아들 해럴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해리스빌에서 '카이 카일러의 바 앤드 그릴'(Ki Cuyler's Bar & Grill)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열어 한동안 소유 및 운영했다.[45] 음식점은 2018년 12월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46] 2008년, 주립 고속도로 M-72의 일부 중 미시간주 앨코나군에 포함되는 도로는 '헤이즌 셜리 '카이카이' 카일러 메모리얼 하이웨이'(Hazen Shirley 'Kiki' Cuyler Memorial Highway)라고 명명되었다.[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