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시(諡)는 원공(元公)이다. 도주 영도(道州 營道: 현재의 허난성다오 현) 출신이다.[1]
생애
본명은 돈실(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황제 북송영종과 동명이었으므로 고쳐서 돈이(敦頤)라고 하였다.[1] 부친인 보성(輔成)은 하주(賀州) 계령현(桂嶺縣)(현재의 黃西省에 속함)의 지사(知事)를 하고 있었다.[1] 모친은 정씨(鄭氏)이다.[1] 주돈이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모친의 일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大學士) 정향(鄭向)의 집에서 양육되었다.[1]북송인종(재위 1022-1063) 경우(景祐) 3년(1036년)에 그는 젊은 나이(20세)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司法官)으로 부임하였다.[1] 그 후 주로 각 현(顯)의 지사를 역임하여 지남강군(知南康軍)을 최후로 57세에 타계했다.[1]
그가 남안(南安)에 있을 때에 정향(程珦)이라는 사람이 같은 관리로서 부임했다.[1] 정향은 주돈이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품고 친하게 교제함과 동시에 자기의 두 아들을 주돈이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1] 이들이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두 형제였다.[1]
영향
송나라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곤 한다.[1] 비록 주돈이 이전에도 이러한 형이상적 사유의 싹이 보인다는 주장이 있지만, 동시대의 유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사상과 더불어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의 2정자(二程子)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간 송나라 시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1][2] 《주자전서》(周子全書) 7권은 모두 주돈이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1] (《주자전서》(朱子全書) 27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주자의 설에 의하면 《통서》는 본래 《역통》(易通)이라고 호칭되어 《태극도설》과 병행하여 쓰여졌다고 한다.[3]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우주론을 논술하고 있으며 《통서》에서는 도덕론을 설명하고 있다.[3]
《태극도설》은 태극도와 도면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4] 《태극도설》은 송대의 도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도덕론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하였다.[4] 그 후의 학자는 거의 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나 사색을 하고 있다.[4]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논쟁도 《태극도설》의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이면서 태극)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집약하여 이루어졌다.[4]
도덕론으로서의 《통서》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성(誠)이다.[3] 주돈이는 성을 현상(現象) 세계의 모든 변화 교체에 잠재하는 참된 기능이라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의 도덕의 근본 규범으로 간주하였다.[3] 《통서》는 주자에 의해 주해되면서 송대 성리학의 준거해야 할 고전이 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