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대회(全朝鮮蹴球大會)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개최되었던 축구 대회이다. 1921년부터 전국 규모로 개최되었으며, 1940년에 제21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1946~2000)와 FA컵(1996~)으로 이어진다. 관서체육회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와 명칭이 동일하나 전혀 다른 대회이다.
역사
1910년대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인 축구 열풍으로 수많은 성인축구 및 학원축구 팀들이 생겨났고, 이에 전국 단위 축구대회 탄생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고 1921년 조선체육회에서는 전조선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한국축구 최초의 전국 규모 축구대회를 창설한다. 초기에는 축구경기만을 대회로 치렀으나, 제15회(1934년)부터 제18회(1937년) 대회까지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현 전국체육대회의 전신)의 일부로서 타 운동종목과 함께 개최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일제의 조선체육회의 강제 해산에 따라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폐지되며 축구경기 역시 폐지의 위기에 몰린다. 이에 따라 1938년부터는 조선축구협회가 이를 존속시키고자, 전조선종합축구선수권대회라는 명칭으로 축구경기만을 따로 주최하게 된다. 특히 조선축구협회는 조선체육회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의 전통을 이어받는 뜻에서, 대회 횟수도 제19회로 명명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령으로 3년 만에 폐지된다.
대회 개요
주최
제1회(1921년)부터 제18회(1937년) 대회는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하였으나, 제19회(1938년)부터 제21회(1940년)대회까지는 조선축구협회에서 주최하였다.
한편 제1회 대회 개최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로부터 첫 정기정간을 당했던 시기라,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후원했으나, 제3회 대회부터는 동아일보가 후원한다.
장소와 시기
출전 팀의 홈 또는 원정 경기장에서 열리는 지금의 FA컵과 달리, 전조선축구대회는 모두 서울에서 열렸다. 초기에는 배재고보, 경성중학, 휘문고보 운동장 등에서 열렸으나, 제8회(1927년) 대회부터는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개최 시기와 관련하여 초기에는 2월이나 4월에도 열렸으나, 이후에는 주로 늦가을인 10월에서 11월에 열렸다. 때문에 1920년대 중반부터는 봄 -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 가을 -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의 구도가 정착된다.
대회 구성
연령별로 성인팀 대 성인팀, 유소년팀 대 유소년팀의 대결구도로 각각 개최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회차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소학부, 중등부, 전문부, 청년부(혹은 일반부)와 같이 대회가 구분되어 있었다. 소학부는 지금의 초등학교, 중등부는 지금의 중고등학교, 전문부는 지금의 대학교, 청년부는 지금의 성인팀에 해당한다.
의미
전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최초로 정식 축구경기규칙이 적용되어 근대식 축구경기가 열린 대회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발행한 운동연감에 실려있는 축구경기규칙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제1회 대회부터 적용한 것이다. 제2회 대회부터는 대회강령 및 경쟁규정, 심판규정이 마련되었으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남아있어 한국축구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1940년을 끝으로 폐지되었고, 초기의 여러 대회를 현 천황배일본축구대회의 뿌리로 인정하여 횟수를 부여하는 일본축구협회와 달리,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전조선축구대회와 FA컵의 관계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FA컵의 전신에 가까운 전국축구선수권대회(1946-2000)와 현재의 FA컵(1996-) 이전에 열린 최초의 전국적인 대회로서 역사적인 상징성이 있다.
↑경성중학교는 1903년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자제를 위한 중학교로 설립되었다. 1910년 국권침탈후 경희궁의 부속건물을 헐고 교사가 지어졌으므로 경성중학 운동장은 현재의 경희궁터이다. 경성중학교는 해방이후 서울고등학교가 되었으며 1980년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경희궁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1894년 평양에 세워진 감리교 북감리회 계열의 학교. 현재,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