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로는 형 2명과 (1994년에 작은 형이 사고로 사망)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이 있는데, 쌍둥이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가 되었다고 한다.
유영철의 아버지는 큰형을 낳고 월남전에 참전했고, 참전 후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음주와 노름, 폭력 등으로 부부싸움이 잦아, 유영철이 1985년6월 12일에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후 홀어머니 아래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예체능계에 소질을 보여 중학교 시절 육상 단거리 달리기, 투포환,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통해 강한 손목과 악력을 갖추는 한편, 장차 화가가 되기를 꿈꾸기도 하였으나 색약 등의 이유로 인해 예고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의 꿈을 접고 국제공고에 입학하였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게 되었고, 유영철이 1988년8월 23일에 이웃 누나의 방에서 돈 23만원과 기타를 훔쳐, 야간주거침입죄와 절도죄로 소년원에 구속됐다. 성장기 때 경찰을 동경하여 응시 시험까지 쳤으나 색맹으로 좌절했다. 이후 경찰관을 사칭하여 금품 갈취로 생계를 이어 나간다.
유영철은 21살 때 마사지사[황 모씨]와 1991년에 결혼하여 바로 아들을 두었으나, 이후 '14차례 특수 절도' 및 '성폭력 등'으로 '20대의 대부분'을 전국 '각지 교도소'에서 보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2000년3월 15일, 특수 절도와 강간 등으로 구속되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아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2002년5월,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전처로부터 이혼을 통보(당시 아들 초등학교 4학년)받았다. 이후 말을 하지 않고 대인기피 현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교도소 안에서 십자가를 부러뜨리며 신은 없다고 믿게 된다.
칼로 큰 개를 찔러 보는 살인실험을 통해 칼을 쓰면 피만 많이 나올 뿐이고, 곧바로 죽이지 못하는 칼보다는 망치로 머리를 강타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곧바로 쓰러뜨릴 수 있는 효과적인(살해)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 마포구신수동 공사장에서 손자루가 긴 망치를 가지고 와, 자루를 떼어낸 후 그 자리에 길이가 짧은 장도리 자루를 넣어 실리콘처리를 하는 방법으로 범행 도구(손자루)가 짧은 해머 한 자루(약 4kg)를 특별 제작하였고, 위협용 재크나이프 한 자루(칼날길이 약 15cm), 범행시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세무 장갑(한 켤레)과 코팅 목장갑(여러 켤레) 및, 위와 같은 범행 도구를 넣어 다니는 검은색 어깨걸이 가방을 각각 준비한다.
이에 앞서 서울 마포구신수동과 노고산동 오피스텔(유영철의 자택 203호)에서, '총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서대문구신촌동 봉원사(인근)야산과 서강대학교(도서관)뒷산 등산로에 암매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살해 사건'으로 그는,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 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다.
이문동 살인사건을 제외한 20명 살인범죄의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유영철은 1심과 2심 공판에서 '중대 범죄 복합 살인: 극단적 인명 경시 살인(죄목)이 추가'되었고, 형사 소송법 및 양형(규정)에 따라 '성폭력 범죄, 강간 살인, 시체 손괴 유기 및 살인, 과실 치사 등의 혐의'로 2004년12월 13일사형 선고를 받고, 1년 뒤인 2005년6월 9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에 대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고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가장 최근인 1997년12월 30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중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로도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2007년12월 30일부터는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유영철은 미국의 잡지 '라이프'가 2008년8월 6일에 보도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쇄 살인자 30인'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9]
수감 이후
2010년 법무부는 유영철, 강호순 등 '흉악 연쇄살인범에 대해 사형을 검토'하기도 하였으나, '외교 마찰 등의 우려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또한 2014년 말에 '성인 소설과 일본 만화책'을 '특정 교도관을 통해 밀반입' 하다가, '다른 교도관에게 적발'되어 '멱살을 잡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