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KBO 리그의 출범에 따라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다. 선수 시절에는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던 공격형 포수였다. 원년 개막전에서 동점 3점 홈런을 쳐 경기의 흐름을 돌리는 데 한 몫했지만, 연장전에서 선수 겸 감독이었던 백인천의 볼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무시한 채 상대 투수 이선희의 유인구를 치는 바람에 3루 주자였던 김인식을 횡사시켜 백인천의 눈 밖에 나게 됐다. 이후 팀 내 주전 포수로 자리잡지 못하게 됐고 1984년 시즌 시작 전 1,500만원의 조건으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맡았고,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는데 당초 타격코치로 출발했지만 1997년 시즌 도중 배터리 코치로 변경됐으며[2]1998년 시즌 후 이희수 감독이 부임하자 수석 겸 배터리 코치로 변경됐고 북일고 감독을 역임한 이희수 감독이 직접 코칭스태프를 짜길 원했으나 구단에서 이희수 감독의 의견을 무시한 채 스태프를 짰는데 비북일파인 본인(유승안)을 수석 겸 배터리코치로 임명했으며 북일고 출신 이상군을 선수로 복귀시켰고 이 과정에서 본인(유승안)과 이희수 감독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으며 결국 1999년 시즌 뒤 2군감독으로 강등됐다가 2000년6월 팀이 7연패에 빠지는 등 침체에 빠져[3]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부인과 사별 후 두 아들과 함께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고 귀국했으며 이로 인해 이희수 감독 후임 물망에 올랐으나[4] 좌절됐고 김성근 삼성 2군감독에게도 제안이 갔지만 LG 코치로 가는 바람에 무산되자 이광환 전 LG 감독이 후임으로 발탁됐다.
그 뒤, 이광환의 후임으로 2002년 1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의욕적으로 세대교체에 나섰음에도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한 탓인지[5]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하고 계약이 만료돼 김인식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이후 KBO 운영위원을 거쳐 경찰 야구단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경찰 야구단 재임 중 2011년에는 창단 첫 퓨처스 북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12년 시즌 후 차남 유민상이 군 복무를 위해 입단해 같은 팀에서 함께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