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에서 자라던 그녀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 만세 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일제 산하 기관에서 산파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직접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1919년 봄 회문(匯文)대학 의예과(1927년 연경대학으로 대학 개칭 후 연경대 의예과, 1949년 북경협화의원(北京協和醫院)에 전입)에 입학한 박자혜 선생은 북경 생활 1년 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였고 대학을 중퇴, 이듬해 첫아들 신수범(신채호의 차남) 선생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어려움때문에 남편과 헤어져 국내로 들어오고 말았다.
한편 신채호는 1923년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였고, 박자혜도 남편 신채호와의 연락을 계속하면서 국내에서 가능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 선생이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여 주었다. 나석주 의사가 토지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설립)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 당시에도, 서울의 길 안내를 지원한 것이 박자혜였다. 신채호 선생이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전향하면 가출옥시켜주겠다는 유혹을 견디어내면서 옥고를 치르다 운명을 달리하기까지(조정래, 태백산맥 3권,해냄), 옥바라지는 물론 자녀 교육, 생계를 모두 떠맡아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둘째아들 신두범(신채호의 삼남) 마저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유일한 희망인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