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함으로서 수립되었다. 독립선언 이틀 전 제2차 대륙회의에서 통과된 리 결의안에서 각 식민지는 자유롭고 독립된 주라고 결의하였으며, 1781년 3월 1일 13개 주 모두가 연합규약을 비준하며 합중국 체계가 갖춰졌다.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며, 이를 통해 미국 독립 전쟁이 종전을 맞이했다. 식민지의 서쪽 경계는 1763년 선언의 경계선에서 미시시피강까지 확대되어, 면적이 거의 두 배 가량 증가하였다. 새로 얻은 땅은 준주를 거쳐 주로 만들어졌으며, 간혹 주에서 연방정부에 토지를 할양하기도 하였다.
미국 역사 최초의 대규모 영토 확장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이었으며, 이 때 면적이 약 두 배 가량 증가하였다. 동남쪽의 스페인령 플로리다와의 국경은 분쟁 지역이었으나, 1821년 스페인이 플로리다와 오리건 컨트리를 미국에 할양하며 종결되었다. 비록 이 시기에는 영국과 오리건을 공유하기는 하였으나. 미국은 오리건을 통해 태평양에 진입할 수 있었다.[2] 1845년 텍사스 공화국 합병으로 인해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멕시코 영토의 북쪽 절반을 획득하였다. 이 시기 획득한 영토는 캘리포니아주 등 빠르게 주로 편입되었다.[3]
미국 국내 산업 개발이 서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 제도가 허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으며, 미주리 타협이나 피의 캔자스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논쟁은 1861년 초 미국 남부가 합중국을 탈퇴한 후 아메리카 연합국의 수립을 선포하며 극에 달하였으며, 이어진 남북 전쟁을 통해 1865년 연합국은 패배하여 미국 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부 주는 결국 합중국으로 재편입되었다. 19세기 내내 이루어진 서부로의 확장은 명백한 운명이 주요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1856년 구아노 제도법을 통해 미국이 북아메리카 바깥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미국이 카리브해와 태평양에 있는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작은 무인도 여럿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는데,[4] 이 중 대다수는 다른 국가와의 영유권 경쟁으로 인해 결국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였다. 태평양 확장은 1893년 하와이 왕국 정부가 전복된 5년 후인 1898년 하와이가 합병되며 끝을 맞았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함으로서 북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대규모 영토 획득이 이루어졌다. 쿠바 독립 전쟁에 대한 지지와 USS 메인의 침몰이 배경이 되어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여기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획득하였으며, 쿠바를 몇 년 간 점령하였다. 1900년 제2차 사모아 내전을 통해서는 아메리칸사모아를 획득하였으며,[5] 1917년에는 덴마크로부터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구매하였다.[6]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영토로 계속 남아 있으나, 필리핀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주요 전장으로 발전한 후 1946년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엔은 태평양의 여러 섬을 미국에 신탁통치로 넘겼으며,[7] 이 중 북마리아나 제도는 미국 영토가 되었으나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팔라우는 독립하였다. 미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국제적 영토 변화는 1904년 획득한 파나마 운하 지대로, 파나마 운하를 관리하기 위해 미국이 획득한 운하 주변의 영토였다. 이 지역은 1979년 최초 반환을 거쳐 1999년 최종적으로 파나마에 완전히 반환되었다.
주는 대체로 만들어진 후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주 3개(켄터키, 메인, 웨스트버지니아)만이 다른 주에 속한 땅에서 바로 형성되었으며, 다른 주는 모두 연방 직할지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만들어졌다. 주 4개(루이지애나, 미주리, 네바다, 펜실베이니아)는 수립 이후 연방 영토를 획득하여 상당 수준 확장되었다. 1912년 애리조나주가 미국 본토에서 생겨난 마지막 48번째 주가 되었으며, 1959년 마지막 50번째로 하와이주가 생겨났다.
주 다수는 서로 간의 경계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었으며, 토지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실제로 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도에 표시하지도 않았었다. 특히 노스캐롤라이나의 경계는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와의 경계는 여러 번에 나눠 조사하여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며,[27][28] 버지니아와의 경계 조사는 바다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절반 정도만 들어가고 종료되었다.
동북쪽 주인 코네티컷, 매사추세츠만, 뉴욕은 모두 경계 서쪽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주장 범위가 서로 겹쳤으며, 버지니아의 서쪽 영유권 주장은 방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세 주 중 코네티컷만 진지하게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버지니아만 실질적으로 군(카운티)을 설치하여 제한적으로나마 행정을 펼쳤다.
영국은 새로 생긴 아메리카 합중국 전역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이 중 동북쪽 해안에 있는 작은 섬인 마키아스실섬과 노스록은 현재까지 영유권 분쟁 중에 있다.[29]
버몬트가 '동부 연합'이라고 불리던 뉴햄프셔 마을 일부가 버몬트에 합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지역은 뉴햄프셔 정부가 해안 지방에만 집중한다는 불만을 이유로 3월 12일 버몬트 공화국에 참여하겠다는 서명을 제출한 바 있었다. 버몬트는 끝까지 이 지역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32][35][36][37][b]
분쟁:
1778년 10월 21일
버몬트가 대륙회의의 압력으로 인해 동부 연합 합병을 철회하였다. 1779년 2월 12일에 입법부에서는 동부 연합 합병이 처음부터 무효였던 것으로 간주하기로 결정하였다.[35][36][37]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가 내륙 지방의 경계선을 조사하였다. 버지니아 측의 조사는 테네시강에 도달했으나 노스캐롤라이나 측은 컴벌랜드고개까지밖에 가지 못했으며, 두 조사팀의 거리는 약 2마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두 주 모두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얇은 영역이 생겼다. 경계 자체는 북위 36°30′ 선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조사 시의 문제로 인해 경로가 북쪽으로 틀어져, 테네시강에 도착했을 때는 약 10마일 정도의 오차가 생겨 있었다.[39][24]
버몬트가 다시 뉴햄프셔 부근의 여러 동부 연합 마을을 합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778년 최초 시도에 비해 버몬트에 합류하고자 한 마을의 수는 증가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정확한 경계선은 불분명하며, 버몬트는 끝까지 이 지역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32][41][36][37][c]
분쟁:
1781년 6월 16일
버몬트가 동부 확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서부 연합'이라고 부르는 뉴욕의 여러 마을을 합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버몬트는 끝까지 이 지역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32][36][42][43] 합병 주장이 이루어진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며, 6월 16일, 6월 26일, 7월 18일이라는 주장이 각각 존재한다.[d]
1780년 2월 29일 뉴욕이 연방정부에 할양한 서부 영유권 주장을 연방정부가 수용하였다. 뉴욕은 새 서부 경계선을 온타리오호 서쪽 끝에서 남쪽으로 그은 선으로 정하였다. 당초 뉴욕은 이리호, 휴런호, 미시간호로 둘러싸여 일리노이강, 미시시피강, 테네시강까지 이어지는 영역 전체를 주장했으며, 북쪽 경계는 펜실베이니아와 닿는 애팔래치아산맥이었다.[45] 이 영유권 주장이 어디서 유래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장을 포기하였다는 자료는 다수 존재하나,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초 해당 지역을 점령했던 이로쿼이 연맹이 할양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46] 하지만 뉴욕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진지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할양된 부분 중에는 펜실베이니아 북부의 작은 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지역을 이리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른다.[47][18]
1782년 12월 30일
연합회의가 코네티컷이 영유권을 주장한 펜실베이니아 북부의 땅이 펜실베이니아의 일부라고 선포함으로서 양키-펜실베이니아 전쟁을 끝내려고 시도하였다.[48][20] 이 영유권 주장은 코네티컷의 북쪽 및 남쪽 경계를 뉴저지와 뉴욕은 건너뛰고 서쪽으로 확장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분쟁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나 코네티컷의 공식적 영유권 주장은 이를 통해 막을 내렸다.
파리 조약에서는 애매하게 쓰인 조문과 지리 조사의 부족으로 인해 불분명한 점이 몇 존재하였다.
동북쪽 국경은 세인트크루아강의 곶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정의하였으나, 이 곶은 여러 곳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북쪽 국경은 우즈호의 최서북단 지점부터 미시시피강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정의하였으나, 미시시피강의 발원지는 이 선 남쪽에 존재하여 미시시피강과 만나는 지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지도에서는 이 시기의 국경을 우즈호부터 미시시피강의 발원지인 아이태스카호까지 남쪽으로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표시하였다.
슈피리어호부터 우즈호로 이어지는 국경은 "긴 호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애매하게 정의되었으며, 양 측 모두 이를 서로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였다.
파리에서 맺어진 평화 조약 중에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의 조약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때 영국이 플로리다를 스페인에 할양하였다. 영국은 서플로리다 통치 기간 중 서플로리다의 경계를 북쪽으로 옮겼으며, 스페인에게 할양할 때 이를 반영하여 서플로리다 전체를 할양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 간의 조약에서는 서플로리다의 확대된 부분, 정확히는 북위 31°선 북쪽을 조지아에 할양하였으며, 이는 경계 조정 이전의 서플로리다만을 스페인에 할양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페인 총독 일부는 미시시피강에 위치한 요새를 점령해 테네시강 남쪽의 영토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이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불분명하며, 다른 서플로리다 경계 주장과 겹쳤기 때문에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52]
분쟁:
1784~1803 (영토 정비)
날짜
사건
지도
1784년 8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 중부(현재의 테네시 동부)에서 주 정부의 행정에 불만을 갖고 프랭클랜드주로서 독립을 선포하였다.[f][53] 프랭클린주 정부는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행정력을 행사하였고, 주의 지위를 얻기 위한 청원을 벌여 필요치인 9개 주 중 7개 주의 동의를 얻어냈으나, 존속 기간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54][55]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정부에 서부 영유권을 할양하였는데,[23][59] 실제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으며 부정확한 토지 조사로 인해 생겨난 오류였다. 영유권 주장 지역은 "노스캐롤라이나와의 경계부터 투갈루강의 발원지 사이에 놓인 땅"이었는데, 실제로 투갈루강의 발원지는 노스캐롤라이나 안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지역은 현실적으로 이미 조지아에 속해 있었으며, 1802년 공식적으로 할양되었다.[60]
1800년 연방정부가 입주할 예정인 연방구컬럼비아구가 메릴랜드와 버지니아가 할양한 영토에서 수립되었다.[80][81] 컬럼비아구는 넓이 100 제곱마일의 마름모 모양의 땅으로, 남쪽 모서리는 포토맥강에 걸쳐 있다. 당시에는 컬럼비아구라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는 '연방구'로만 칭하였다. 1791년 9월 공사 현장에서는 도시의 이름을 '컬럼비아 준주'로 칭하였고, 이후에 제정된 법 중 일부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컬럼비아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컬럼비아구'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871년 컬럼비아구 기본법이 최초이다.[82] 지도에서는 컬럼비아라는 이름 자체는 비공적이나마 지속적으로 사용한 점을 고려하여 이 지역을 컬럼비아구로 칭하고 있다.
미국 의회가 새로 지어진 수도인 컬럼비아구 내 워싱턴으로 이동하였다.[25] 이 날짜는 거주지법에 정해진 날짜인 12월 1일보다 2주 앞선 것이었는데, 이는 존 애덤스 대통령이 대통령 재선을 위해 남부 유권자 표를 얻고자 예정을 앞당기게끔 의회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였다.[99]
조지아가 야주 토지라고 부르는 영토 서쪽 절반을 연방정부에 할양하였다.[n] 이와 동시에 연방정부는 기존에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정부에 할양하였던 영토를 조지아에 할양하였다. 다만 이 지역은 이미 실질적으로 조지아가 관리하고 있었으며,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영유권 주장은 부정확한 토지 조사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였다.[12]
1803년 3월 1일
북서부 준주의 남쪽 절반과 인디애나 준주의 일부가 17번째 주인 오하이오주로 편입되었다. 북서부 준주의 나머지 영토는 인디애나 준주로 편입되었다.[102][57] 서쪽 경계는 그레이트마이애미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연방정부는 북쪽 경계를 미시간호 남쪽 모서리에서 서쪽으로 그은 선으로 본 반면, 오하이오 헌법에서는 미시간호에서 이리호 서쪽 모서리인 마우메만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보았는데, 이 설명 차이로 인해 이후 털리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03년 11월 3일
테네시와 버지니아 사이의 경계에 관한 토지 조사가 완료되어 영토 분쟁이 막을 내렸다. 테네시와 켄터키 사이의 경계는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39][103]
1803년 11월 30일
사우스윅 인근 토지가 코네티컷에서 매사추세츠로 할양되며 장기간 지속된 두 주 간의 경계 분쟁이 막을 내렸다.[14] 11월 30일은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전달된 날로,[104] 공식 토지 교환이 어느 날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03~1818 (루이지애나 매입)
날짜
사건
지도
1803년 12월 20일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였다. 매입 절차 자체는 4월 30일에 완료되었으며, 12월 20일은 뉴올리언스에서 공식 영토 이양식이 진행된 날짜이다.[105] 이듬해 3월 10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영토 이양이 정식으로 승인되었으며, 이 날을 세 국기의 날이라고 부른다.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강 분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o] 루이지애나 남부에서 미국은 서플로리다 중 페르디도강 서쪽에 있는 영토까지 구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스페인은 서플로리다 국경선까지만 구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p][106] 서남쪽 누에바에스파냐와의 국경도 미국은 사빈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스페인은 칼카슈강이라는 관점을 고수하여 영토 분쟁이 발생하였다.[105]
인디애나 준주에서 미시간 준주가 생겨났다. 미시간 준주의 영토 범위는 미시간호 남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그은 선의 북쪽과, 미시간호 북쪽 모서리에서 북쪽으로 그은 선의 동쪽이었다.[110][111] 경계선 동남쪽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경계 북쪽 털리도 지대의 영유권을 주장한 오하이오와 겹쳤으나, 당시 미시간호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앨라배마 준주가 터스컬루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영토가 우연히 미시시피와 겹치게 되었다. 터스컬루사군의 경계는 "서쪽으로 톰빅비강까지, 그 다음 북쪽으로 코튼진포트까지"로 정의하였는데,[131]톰빅비강의 수원과 코튼진포트 모두 미시시피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1818년 조약이 발효되며 우즈호 서쪽에서의 영국과의 국경이 북위 49°선으로 정해졌으며, 오리건 컨트리가 영국과의 공동 점유 지역이 되었다.[2][134][135] 당시 오리건 컨트리의 북쪽 경계는 정의되지 않았는데, 러시아가 점유하던 영토까지 침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지도에서는 편의 상 이후에 정해진 선인 북위 54°40′선을 사용하였다.
이 날짜는 공식 문서에서 아칸소 준주의 표기를 처음으로 "Arkansaw" 대신 "Arkansas"로 사용한 날이다.[141]
1820년 5월 12일
켄터키와 테네시 사이의 경계가 확립되었다. 컴벌랜드고개와 테네시강 사이의 경계선이 북위 36°30′선에서 북쪽으로 10마일이나 벌어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시시피강에서 위도를 맞춰 테네시강까지 동쪽으로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 방법으로 경계 끝 부분이 36°30′선과 일치하게끔 하였다.[39]
1820년 7월 19일
앨라배마의 주 편입 과정에서 제정된 법령에 따라 앨라배마와 미시시피 사이의 남쪽 경계선이 미시시피 영토를 침범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128][142] 토지 조사 결과에 따라 경계 남쪽 끝이 동쪽으로 3.8마일 이동되었으며, 경계선의 변화는 앨라배마의 워싱턴군까지 적용되었다. 이 변경 사항이 적용된 날짜는 불분명하며, 대체로 보고서가 작성된 날자인 5월 28일이나 실제 경계선 표지가 설치된 7월 19일 중 하나로 본다.
서류 상의 변화:
1820년 12월 19일
앨라배마가 일부 군의 경계를 조정하였다. 이를 통해 1818년 2월 6일부터 존재한 미시시피와의 영토 중복이 사라졌다.[143]
아칸소 준주 중 미주리와의 경계선부터 서쪽으로 40마일 간 지점에서 남북으로 그은 선의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가 비법인영토로 돌아갔다.[137][148]
1825년 1월 12일
러시아 제국과의 조약을 통해 오리건 컨트리의 북쪽 국경이 북위 54°40′선으로 정해졌다. 이는 미국 측에만 적용되는 조약이긴 하였으나, 이후 영국과도 별도의 조약을 통해 같은 선을 국경으로 정하였다.[149] 이전에도 이 선이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하고 있던 점을 고려하여 오른쪽 지도에는 이전부터 이 선을 사용하여 국경을 표시하였다.
헨트 조약에 따라 영국과 메인 사이의 국경 분쟁을 중재하던 빌럼 1세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주어진 지도만으로는 국경 분쟁을 조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빌럼 1세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는데, 영국 정부는 받아들였으나 메인 정부는 반대하였으며, 1832년 1월 19일 미국 정부가 타협안을 거부하였다.[152]
(지도 상의 변화 없음)
1832년 7월 9일
영국과의 분쟁 지역이던 코네티컷호 북쪽 뉴햄프셔 지역이 인디언스트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153] 인디언스트림 공화국의 면적 자체는 작았으나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실효 지배력을 발휘하였다.
미시간 준주 서부 영역이 위스콘신 준주로 법인화되었다.[y][157][158]오대호 사이에 있는 두 반도는 미시간 준주에 남았는데, 위스콘신 준주가 털리도 지대의 영유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어퍼반도를 할양하기로 하였다. 위스콘신 준주는 당초 이 토지 교환안을 거부하였으나 12월 14일 결국 동의하였다.
뉴욕 및 버몬트와 영국 사이의 국경도 이 조약을 통해 명확하게 정해졌다. 1816년 섐플레인호에 있는 반도에서 "블런더 요새"라고 칭한 요새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 요새의 위치가 당초 토지 조사를 통해 정한 국경선보다는 남쪽에 있었으나 파리 조약에서 정한 국경선인 북위 45°선보다는 북쪽에 있어 영국 영토 내임이 밝혀지자 요새 건설은 중단되고 요새 자체는 버려졌다. 웹스터-애슈버턴 조약에서는 정확한 위도선 대신 토지 조사를 통해 정한 국경선을 사용한다고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요새가 미국에 속하게 되었다. 1844년 이 위치에 몽고메리 요새가 세워졌다.[171] 토지 조사를 통해 정해진 국경선은 비록 당초 조약의 규정과는 맞지 않는 면이 있었으나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당한 국경선으로 간주되었다.
분쟁:
1843년 7월 5일
오리건 컨트리의 정착민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공식 기관은 아니었으나 오리건 지역에 어느 정도 행정력을 행사하였다.[172]
텍사스 공화국이 합병 후 28번째 주인 텍사스로 편입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영토가 서남부 리오그란데강까지 확장되었다.[174][175]멕시코는 텍사스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여러 출처에서 멕시코가 텍사스 동부의 독립 자체는 인정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벨라스코 조약을 거부하였다. 텍사스는 1846년 2월 19일 공식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미국에 넘겼다.[176] 텍사스 합병으로 인해 몇 달 후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였다.[176]
분쟁:
1846년 6월 15일
오리건 조약을 통해 우즈호 서쪽으로 이어지는 북위 49°선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국경으로 정해졌는데, 대륙으로 한정한 것은 밴쿠버섬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리건 컨트리의 공동 점유는 종료되었으며, 미국이 획득한 영토는 비법인영토가 되었다.[177]
오리건 조약에서는 밴쿠버섬과 대륙 사이 어느 해협을 경계로 할지에 대해 모호하게 규정해 두었으며, 이로 인해 샌환 제도의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178]
컬럼비아구가 알렉산드리아군을 버지니아에 반환하였다.[81]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된 것은 1846년 7월 9일이었으며,[183] 알렉산드리아군 주민이 동의하였다고 명시된 대통령령이 발효된 것은 1846년 9월 7일이었다.[184] 1847년 3월 13일은 버지니아가 알렉산드리아군을 공식적으로 다시 소유하기 시작한 날짜이다.[185]
1848년 5월 29일
위스콘신 준주의 남쪽 부분이 30번째 주인 위스콘신으로 편입되었다.[ab] 나머지 영토는 비법인영토가 되었으나,[158][186]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기존의 정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미국 하원 파견대표를 선출해 1849년 1월 15일에 실제로 하원에 파견하기도 하는 등, 실질적으로 위스콘신 준주가 계속 이어졌다.[187]
지방 정부가 데저릿주를 수립하고 멕시코 할양지 대부분 등 서남부 영토 상당부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데저릿주는 미국에 편입되고자 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대신 1950년 유타 준주가 수립되었다.[194] 데저릿주의 영유권 주장 범위는 텍사스 및 오리건 준주의 영유권 주장 지역과 겹쳤다.
멕시코 할양지 서부가 31번째 주인 캘리포니아로 편입되었다.[ad][3][199] 북위 37°선 북쪽과 로키산맥 서쪽에 남은 영토는 유타 준주가 되었다.[200][201] 유타 준주의 영토 일부는 텍사스와 겹쳤는데, 이 부분은 같은 해 12월 13일에 유타 준주가 매입하였다. 지도에서는 이후 매입한 부분까지 포함하여 표시하였다.
1850년 12월 9일
미국이 등대를 짓기 위해 이리호 내 버펄로 인근의 암초를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암초 자체는 미들 환초에 있었으나, 등대의 이름은 인근 호슈 환초의 이름을 따 붙였다.[202] 암초 자체는 영국 영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일종의 월경지가 만들어졌다.[203]
북위 37°선 북쪽의 비법인영토에서 캔자스 준주가, 북위 40°선 북쪽의 비법인영토에서 네브래스카 준주가 생겨났다.[209][210][211] 나머지 비법인영토 중 서경 100°선 동쪽의 비법인영토에서는 원주민 부족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인디언 준주가 만들어졌다.
텍사스 팬핸들과 캔자스 준주 사이에 있는 좁은 지역은 영유권 주장 없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캔자스 준주 경계보다는 남쪽이었으나 미주리 타협에서 노예제의 한계선으로 제시한 북위 36°30′선보다는 북쪽이었기 때문에 텍사스가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공유지 지대 또는 "무인지대"로 불리었다.[212]
1854년 6월 30일
미국이 대륙횡단철도 남부 노선 건설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토지를 구매하였다. 이를 개즈던 매입이라고 부른다.[ag][213][214] 구입한 토지에 분쟁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토 분쟁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188]
지방 정부가 네브래스카, 뉴멕시코, 워싱턴, 유타, 캔자스에 속한 영토를 모아 제퍼슨 준주를 수립하였다.[aj] 연방정부는 제퍼슨 준주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제퍼슨 준주는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행정력을 행사하였으며, 콜로라도 준주가 생겼을 때 제퍼슨 준주의 법령 대부분을 받아들였다.[225]
섬터 요새 전투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군대 대응 촉구와 맞물려 버지니아가 미국 의회를 탈퇴하며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228] 다만 동해안의 제1 선거구, 워싱턴 D.C. 인근의 제7 선거구, 버지니아 서북부의 제10, 제11, 제12 선거구는 의회에 계속 남았다.
노스캐롤라이나가 연합국에 가입하였다. 주의 연합국 가입을 위해서는 발효 전 대통령의 포고가 필요하였는데,[241] 5월 21일은 2차 출처 대부분에서 이 포고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날짜로,[242] 이와 관련한 유일한 1차 출처는 7월 20일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이미 대통령 포고가 이루어졌다고 언급한 연설밖에 없다.[243]
다코타 준주, 아이다호 준주, 유타 준주의 영토에서 와이오밍 준주가 만들어졌다.[ar][285][284] 와이오밍 준주의 영토는 1869년 5월 19일 준주 정부가 만들어질 때까지 다코타 준주가 관리하였는데,[286] 와이오밍 준주 기본법 자체는 7월 25일에 통과되었으나 1869년 5월 19일 준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와이오밍 준주가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와이오밍 준주 서부에 다코타 준주의 작은 영토가 오류로 인해 남게 되었다.[287]
1868년 8월 12일
구아노 제도법을 근거로 한 영유권 주장 중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카리브해의 섬"에 대해 이 날부터 영유권을 주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 섬이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4]
구아노 제도법을 근거로 멕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웨스턴트라이앵글섬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4] 영유권 주장 문서에는 "데아네스"라는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섬의 좌표 자체는 아베스섬과 일치하였으나, 동시에 이 문서에는 "아베스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무효하다는 내용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었다.
스페인이 괌, 포르토리코, (2000만 달러 지불을 조건으로)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기로 한 파리 조약이 맺어지며 미국-스페인 전쟁이 막을 내렸다.[320]필리핀 제1공화국은 필리핀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미국에 할양된 영토 중에는 네덜란드가 통치하던 팔마스섬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영유권이 겹친다는 사실은 1906년 1월 21일이 되어서야 밝혀졌다.[321] 또한 당시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고 있었으나 할양받거나 영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쿠바로부터 관타나모만 남쪽 토지를 해군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임차하였다.[334] 조약의 발효일은 1903년 2월 23일이었으며, 12월 10일은 공식 영토 이양식이 이루어진 날이다.[335]
(지도 상의 변화 없음)
1904년 5월 4일
미국이 파나마 운하 지대의 소유권을 얻었다. 이 시점에서는 운하 지대를 운하 중심 양쪽 5마일까지로 단순히 정의하였으며, 콜론이나 파나마시티는 제외하여 파나마의 월경지가 되었고, 파나마가 소유한 항구의 영해도 제외하였다.[336] 운하 지대를 미국에 넘기는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은 1904년 2월 26일 비준되었으며,[337] 콜론 북쪽에 있는 등대를 운하 지대에 추가하는 내용을 담은 정식 국경 조약은 1904년 6월 15일 비준되었다.[338][339]
카리브해:
1904년 7월 16일
마누아 제도가 미국에게 공식적으로 할양되어 투투일라 해군기지에 추가되었다.[322] 미국은 1900년 2월 19일부터 이미 마누아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에는 차이를 표시하지 않았다. 할양 조약이 의회에서 비준된 날짜는 1929년 2월 20일이다.
캐나다(영국이 대변)와 미국 간 새로 국경 조약을 맺음으로서 파사마쿼디만에 있는 캐나다-메인 간 해상 국경의 모호한 점을 다루었다.[349][350][351] 기존 국경은 포프스폴리섬을 관통하였기 때문에 이 점이 몇 년에 걸쳐 논란이 되었는데, 새 국경을 포프스폴리섬 동쪽을 지나게 조정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352][353]
1911년 7월 17일
투투일라 해군기지의 이름이 아메리칸사모아로 바뀌었다.[354] 해군기지 자체는 땅의 이름과는 관계 없이 1951년까지 운영되었다.
니카라과로부터 콘 제도를 99년 간 임차하였다. 다만 이는 주권의 양도는 아니었으며, 미국 또한 콘 제도를 도서 지역으로 관리하지 않았다.[359]
(지도 상의 변화 없음)
1915년 5월 1일
기존에 파나마 운하 지대를 단순히 운하를 둘러싸는 영역으로 정의한 것과 달리, 이 때 맺어진 조약에서는 운하 지대의 국경을 상세하게 정의하였다. 주요 변경점으로는, 파나마시티를 파나마 본토와 잇기 위해 운하 지대의 일부를 파나마에 할양한 것, 기존에 파나마시티 항구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준이 되었던 라스트레스에르마나스제도의 중앙 섬이 운하 지대로 완전히 할양된 점, 가툰호와 주변 영해가 운하 지대에 정식으로 합병된 점, 콜론 서북부의 영토가 운하 지대에 할양된 점이 있었다.[360][361][362]
델라웨어와 펜실베이니아 간의 웨지 분쟁에서 델라웨어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분쟁 영토는 지속적으로 델라웨어의 행정 하에 있었으며 19세기 중반에는 델라웨어 의회 의원을 선출하기도 하였으나,[375] 1900년 경 연방정부가 발행한 지도에서 이 지역을 펜실베이니아의 일부로 표기하였다.[376] 두 주는 중재안에 합의하였으며, 6월 30일은 의회에서 중재안이 비준된 날이다.[377][378] 일부 자료에서는 1892년 경계 재조사 과정에서 뿔 모양의 얇은 영토가 델라웨어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이양되었다고 적혀 있으나,[375][378][379] 연방정부가 발행한 지도 중 이를 반영한 지도는 없으며 실제로 영토 이양이 진행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캐나다와의 국경이 다수 조정되었다.[385][386] 육상 국경의 변화는 우즈호와 로키산맥 사이의 국경을 어떻게 정할지에 관한 것 뿐이었다. 기존 국경은 국경 표지석 사이를 위도선을 따라가는 곡선으로 보았으나, 이를 표지석 간을 직선으로 잇는 선으로 바꾸자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약 30~35에이커 가량을 얻었다. 변화한 영토의 크기가 매우 작고 실질적인 영향이 없다시피한 데 더해, 정확히 어느 지점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관한 설명이 부족한 점으로 인해 오른쪽 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았다. 우즈호 내의 국경에서는 기존 측량의 문제로 인해 국경선이 스스로와 만나 캐나다 영해에 둘러싸인 미국 월경지가 다수 존재했는데, 새 조약에서는 우즈호의 최서북단 지점을 최남단의 국경 교차 지점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으로 펀디만의 해상 국경이 조정되며 캐나다가 영해 9에이커 가량을 얻었다.
존스턴 환초가 연방 조류 보호지로 지정되어 미국 농무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387] 존스턴 환초의 영유권은 1858년 이래로 미국과 하와이 모두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으나, 구아노 채굴 이외에는 경제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섬 자체가 수십 년 간 버려진 채로 있었다.[224]
(지도 상의 변화 없음)
1926년 1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미시간과 위스콘신 사이의 경계를 정의하였다. 메노미니강의 퀸세크폭포를 기준으로 폭포 남쪽의 모든 섬은 위스콘신에게, 폭포 북쪽의 모든 섬은 미시간에게 할당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섬들이 교환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경계를 정의할 때의 실수로 인해 미시간호도어반도 북쪽에 있는 일부 섬에서 영유권 주장이 겹치는 문제가 생겨났다.[388]
영국이 북보르네오에 속하던 망시 제도 전체와 터틀 제도의 섬 7개를 필리핀 제도 도서 정부에 할양하였다. 당초 이 섬들은 1900년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을 예정이었다. 조약에는 반환 요청이 있을 때까지 해당 섬을 영국이 계속 관리한다는 조항이 담겼으며, 필리핀 독립 이후 필리핀 정부가 반환 요청을 함으로서 섬을 돌려받게 된다.[394]
프레시디오 및 히달고 근처에서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멕시코와 텍사스 간의 영토 교환이 이루어졌으며,[422] 이 중에는 리오 리코가 있는 오르콘 트락트와[423]로마 근처의 비버섬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토 교환은 주로 리오그란데강의 범람에 맞추어 일부 구역을 직선화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멕시코가 양도한 영토의 면적은 823 에이커 (3.33 km2), 미국이 양도한 영토의 면적은 2,177 에이커 (8.81 km2)였다.[424]
1977년 12월 16일
미국과 쿠바 사이의 해상 국경에 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으나, 2년마다 합의를 갱신하는 방식으로 잠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351]
국제사법재판소가 메인만에서의 미국-캐나다 간 해상 국경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판결하였다.[434][351] 판결로 인해 교환한 영토는 없으며, 판결에는 마키아스실섬의 영유권 자체에 대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으나, 섬 주변의 영해에 대한 정의는 담겼다(면적 210 제곱해리의 영역).[421]
미국과 소련 간의 해상 국경이 잠정적으로 정의되었다.[437][351] 이 날은 두 국가가 조약을 비준할 때까지 내용을 준수하기로 합의한 날로,[438] 미국 의회는 1991년 9월 16일 조약을 비준하였으나[439] 소련이나 계승국 러시아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과 멕시코가 맺은 1905년 방코 협약에서는 만약 홍수 등으로 인해 리오그란데강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뀔 경우 국경을 강의 흐름에 맞추어 조정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455] 특히 리오그란데강 하구를 중심으로 강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면 종종 휘어진 강에 둘러싸인 땅인 방코(스페인어: Banco→강둑)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국제경계수역위원회가 국경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조사한다.[456] 1905년 협약에 따라 1910년부터 1976년까지 총 37차례에 걸쳐 영토 교환이 진행되었는데, 교환된 땅의 크기는 작았고 (1~646 에이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다.[457][458][459]
↑새 국가의 국경은 식민지의 국경을 그대로 따라갔다. 편의 상 지도에 나타난 국경은 1783년 파리 조약에서 규정한 국경을 사용하였다. 파리 조약 전후의 실질적인 국경선 차이는 서남쪽 국경으로, 영국이 플로리다 서부를 가지고 있을 때는 경계선을 북쪽으로 옮겨 야주강 하구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정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조지아에 속하지 않았다. 파리 조약에서는 이 영역과 북위 31°선 사이의 지역을 미국에 할양하였다.
↑버몬트 합류를 희망했던 뉴욕의 마을은 그랜빌, 그린필드(불명, 그린필드라는 마을 자체는 있으나 서부 연합의 한계선인 허드슨강보다 서쪽에 있음), 리틀후식(불명, 후식 근방으로 추정) 블랙크리크(불명, 히브런 근방으로 추정), 새러토가, 스코티쿡(샤티코크로 추정), 스킨스버러, 어퍼화이트크리크(화이트크리크로 추정), 케임브리지, 포트 에드워드, 후식, 킹스베리였다.[42] 정확히 합병된 마을이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는데, 이는 당시 마을 간의 경계는 분쟁이 생겼을 때만 상세하게 정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는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고 있다.
↑파리 조약에서 정한 국경선은 펀디만에서 시작해 "세인트크루아강"(정확히 어느 강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의 수원까지, 그 다음 북쪽으로 해당 지역의 봉우리("노바스코샤의 최서북 모서리")까지, 그 다음 봉우리를 따라 코네티컷강의 "최서북 하구"(정확히 어느 수원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내려가 북위 45°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세인트로렌스강까지, 강을 따라 오대호까지, 그 다음 온타이로호, 나이아가라강, 이리호, 디트로이트강, 세인트클레어호, 세인트클레어강, 휴런호, 슈피리어호, "긴 호수"(어느 호수를 말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를 지나 우즈호의 최서북 모서리까지, 그 다음 미시시피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하지만 우즈호는 미시시피강의 수원지보다 북쪽에 있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지도에서는 이 시기의 국경을 두 지점 사이를 거의 일직선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직선으로 그은 다음, 그 다음부터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위 31°선까지, 그 다음 채터후치강을 따라 채터후치강과 플린트강의 합류 지점까지 동쪽으로, 합류 지점에서 세인트메리스강의 수원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이어지는 선으로 표시한다.[51]
↑프랭클린주의 경계는 정해진 적이 없으며, 지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계선을 사용하였다.
↑매사추세츠가 할양한 영유권 주장 지역은 뉴욕 및 펜실베이니아 서쪽에서 시작해 미시시피강까지 이어지는 땅으로, 예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 할당된 영역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이 영역의 북쪽 경계는 위니페소키호에서 북쪽으로 1리그 떨어진 지점에서 서쪽으로 그은 선이며, 남쪽 경계는 매사추세츠 서남쪽 모퉁이에서 서쪽으로 그은 선이다.[45]
↑코네티컷이 할양한 영유권 주장 지역은 펜실베이니아 서쪽 120마일 지점(웨스턴 리저브 서쪽 경계)부터 서쪽으로 미시시피강까지 이어지는 땅으로, 북쪽 경계는 북위 41°선, 남쪽 경계는 매사추세츠의 서부 영유권 주장 지역과의 경계(약 북위 42°2′선)였다.[45]
↑매사추세츠가 할양한 영유권 주장 지역은 뉴욕의 일부로, 델라웨어강이 뉴욕을 떠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82마일 떨어진 곳부터 서쪽으로 이어지는 땅이다. 서쪽 경계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며, 나이아가라강 동쪽 1마일 지점까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45]
↑노스캐롤라이나와 연방정부 토지 사이의 경계는 북쪽부터 서남쪽으로 그레이트스모키산맥을 따라 내려가는 선이었으나, 토지 조사 시의 문제로 인해 산맥을 따라가지 않고 대략 남쪽을 향하는 선을 그어 사용하였다.[19]
↑새로 정해진 뉴욕과 버몬트 간의 경계는 북쪽부터 섐플레인호와 폴트니강을 거쳐 남쪽 마을 간의 경계로 이어지는 선이었다.[32]
↑북서부 준주와 인디애나 준주 사이의 경계는 남쪽부터 켄터키강 하구에서 리커버리 요새를 이은 다음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선이었다.[97]
↑조지아의 경계는 남쪽부터 채터후치강을 따라 강이 크게 휘어지는 곳(웨스트포인트 인근)까지, 그 다음 닉카약을 통과하게끔 그은 선이었다. 경계의 정의에서는 이 선을 테네시강에 닿을 때까지 연장하고, 그 다음 강을 따라 내려가 강과 테네시가 만나는 지점까지를 경계로 본다고 기술하였으나, 테네시강은 강 전체가 테네시에 속해 있었다.[12]
↑당시 구매한 영토에 미주리강과 레드강의 분지도 포함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1818년 조약에서 국경을 명확히 정하기 전까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당시 지도에서는 미주리강 분지는 포함하되 레드강 분지는 제외하여 표시하였다.[105]
↑인디애나 준주와 일리노이 준주 사이의 경계는 남쪽부터 워배시강과 빈센스를 거쳐 북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13]
↑올리언스 준주 중 서북부에 남아 있었던 나머지 영토는 루이지애나 준주로 다시 들어간 것으로 보나, 애초에 올리언스 준주의 경계가 부정확하였던 점으로 인해 상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디애나의 영토는 오하이오강 북쪽 및 워배시강 동쪽으로 정의되었으나, 인디애나 준주의 경계선이 빈센스에서 북쪽을 향해 방향을 바꾼 것과 달리 인디애나주의 경계는 워배시강을 따라가다 빈센스에서 북쪽으로 그은 선과 만나는 지점까지 이어졌다. 인디애나의 북쪽 경계는 미시간호 최남단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1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동쪽으로 그은 선으로, 그레이트마이애미강 하구부터 북쪽으로 그은 선인 오하이오의 서쪽 경계선과 만날 때까지 이어졌다.[97]
↑앨라배마 준주와 미시시피 준주의 경계는 북쪽부터 테네시강을 따라 베어크리크(현재의 픽윅호 인근)까지, 그 다음 워싱턴군의 서북쪽 모서리까지, 그 다음 남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28]
↑아칸소 준주와 미주리 준주의 경계는 미시시피강이 북위 36°선을 만나는 지점부터, 서쪽으로 세인트프랜시스강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북위 36°30′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21]
↑새 국경은 멕시코만부터 시작해 사빈강을 따라 북위 32°선까지, 그 지점부터 북쪽으로 레드강을 따라 서경 100°선까지, 그 지점부터 북쪽으로 아칸소강을 따라 아칸소강의 수원까지, 그 지점부터 북위 42°선까지, 그 지점부터 서쪽으로 태평양까지였다.[106]
↑미주리의 경계는 디모인강의 하구부터 강을 따라 미시시피강에 있는 디모인급류 서쪽 지점까지, 그 지점에서 북쪽으로 캔자스강 하구까지, 그 다음 남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21]
↑아칸소 준주의 새 경계는 북쪽부터 미주리의 서남쪽 모서리부터 직선을 그어 (촉토족의 경계에 맞춰) 아칸소강 상에 있는 포트스미스에서 "동쪽으로 100페이스" 떨어진 지점까지, 그 다음 그 지점부터 남쪽으로 그은 선이었다.[137] 하지만 1909년 아칸소 대법원은 "동쪽으로 100페이스"는 사무상의 오류이며 논리적으로 보면 "서쪽으로 100페이스"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판결하였다.[150]
↑미시간 준주와 위스콘신 준주 사이의 경계는 슈피리어호부터 몬트리올강을 따라 비유사막호까지, 그 지점에서 메노미니강의 수원까지, 그 지점에서 아래로 그린만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하지만 몬트리올강은 비유사막호에 닿기 한참 전에 이미 끝나기 때문에 이 선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며, 이 문제는 1850년에 해결되었다.[111]
↑새로 정한 동북쪽 국경은 파사마쿼디만에서 시작하여 세인트크루아강을 따라 세인트크루아강의 수원까지, 그 다음 북쪽으로 세인트존강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세인트프랜시스강의 수원까지, 그 다음 포헤네가무크호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지점까지, 그 다음 서남쪽으로 세인트존강의 서북쪽 지류까지, 그 지점에서 직선을 그어 세인트존강이 북위 46°25’선을 지나는 지점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강의 수원지까지, 그 다음 고원을 따라 홀스스트림의 수원지까지, 그 다음 북위 45°선을 따라 내려가는 선이었다.[140][15]
↑새로 정해진 국경은 리오그란데강부터 시작해 뉴멕시코의 남쪽 및 서쪽 경계를 따라 힐라강에 만나는 지점까지 간 다음, 강을 따라 콜로라도강까지 만나는 지점까지, 그 다음 해당 지점에서 샌디에고 항구에서 남쪽 1리그 지점까지 그은 선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뉴멕시코의 남쪽 경계에 대해 미국은 북위 31°52′선이라고 주장한 반면, 멕시코는 북위 32°22′선이라고 주장하였다.[188]
↑캘리포니아의 경계는 북쪽부터 서경 120°선을 따라 남쪽으로 북위 39°선과 만날 때까지, 그 다음부터 콜로라도강이 북위 35°선과 만날 때까지, 그 다음 콜로라도강을 따라 내려가는 선이었다.[3]
↑텍사스의 경계는 남쪽부터 리오그란데강을 따라 북위 32°선까지, 그 다음 동쪽으로 서경 103°선까지, 그 다음 북쪽으로 북위 36°30′선까지, 그 다음 동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75]
↑뉴멕시코 준주의 경계는 텍사스주의 경계가 끝나는 북위 36°30′, 서경 103° 지점부터, 북쪽으로 북위 38°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산후안산맥(당시 명칭은 시에라마드레산맥)까지, 그 다음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북위 37°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204]
↑멕시코와의 새 국경은, 리오그란데강이 북위 31°47′선과 교차하는 지점부터, 서쪽으로 100마일, 그 다음 남쪽으로 북위 31°20′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서경 111°선까지, 그 지점에서 힐라강 하구에서 20마일 위에 있는 콜로라도강 상의 지점까지, 그 다음 콜로라도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선이었다.[213]
↑미네소타의 경계는 북쪽부터 레드강을 따라 부아드수강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트래버스호 남단까지, 그 다음 빅스톤호의 남단까지, 그 다음 남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70]
↑오리건과 워싱턴 준주 사이의 경계는 북쪽부터 스네이크강을 따라 오위히강의 하구까지 간 다음 남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191]
↑제퍼슨 준주가 주장한 자신의 영토는 북위 37°선부터 북위 43°선까지, 서경 102°선부터 서경 110°선까지였다.[225]
↑콜로라도 준주의 경계는 북위 32°선과 37°선 사이, 워싱턴 경선을 기준으로 서쪽 25°선부터 서쪽 32°선 사이였다.[231]
↑네브래스카 준주와 다코타 준주의 경계는 동쪽부터 미주리강을 따라 나이어브래러강까지, 그 다음 강을 따라 키야파하강까지, 그 다음 북위 43°선까지, 그 다음 서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211]
↑오클라호마 준주의 경계는 레드강과 서경 98°선이 만나는 곳부터 캐나디안강을 따라 북쪽으로, 세미놀족의 영토까지 밑으로, 그 경계부터 노스캐나디안강까지 북쪽으로, 그 다음부터 크리크족의 영토까지 밑으로, 그 다음부터 서경 96°선과 만날 때까지 동북쪽으로, 그 다음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공유지 지대와 오클라호마 준주 본토를 나누는 체로키 지대가 누락되게 된다.[308]
↑ 가나Vermont State Papers, pp. 136–137: "Agreeably to the recommendation of the committees, the Legislature of Vermont was adjourned to the first Wednesday of April [1781]; at which time, it met at Windsor, and the union of the grants, east and west of Connecticut river, was consummated"
↑ 가나Treaty of Paris, 1783; International Treaties and Related Records, 1778–1974; General Records of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Record Group 11; National Archives.
↑Northwest Ordinance, July 13, 1787; (National Archives Microfilm Publication M332, roll 9); Miscellaneous Papers of the Continental Congress, 1774–1789; Records of the Continental and Confederation Congresses and the Constitutional Convention, 1774–1789, Record Group 360; National Archives.
↑Tindall, William (1919년 2월 25일). “Naming the Seat of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 Legislative Paradox”. 《Records of the Columbia Historical Society》 (Historical Society of Washington, D.C.) 23: 10–25. JSTOR40067136.
↑Carter II, Edward C. (1971–1972), “Benjamin Henry Latrobe and the Growth and Development of Washington, 1798–1818”, 《Records of the Columbia Historical Society》: 139
↑Text from Webster–Ashburton Treaty: "till the line thus run intersects the old line of boundary surveyed and marked by Valentine and Collins previously to the year 1774, as the 45th degree of north latitude, and which has been known and understood to be the line of actual division between the States of New York and Vermont on one side, and the British Province of Canada on the other"
↑Act authorizing readmission on ratification of 14th amendment: 15 Stat.73. Florida ratified the amendment before that law was passed, so Florida was readmitted upon passage of the law.
↑Act authorizing readmission on ratification of 14th amendment: 15 Stat.73. Proclamation of North Carolina's ratification: 15 Stat.703.
↑Act authorizing readmission on ratification of 14th amendment: 15 Stat.73. Proclamations of Louisiana's and South Carolina's ratification: 15 Stat.704.
↑Act authorizing readmission on ratification of 14th amendment: 15 Stat.73. Proclamation of Alabama's ratification: 15 Stat.704.
↑Watkins, Albert (1913). “Nebraska Territorial Acquisition”. 《Collections of the Nebraska State Historical Society》 (Nebraska State Historical Society) XVII: 53. 2015년 5월 18일에 확인함.
↑Myers, Arther J.; Vosburg, David L. (November 1964). “Distances Within the State of Oklahoma”(PDF). 《Oklahoma Geology Notes》 (University of Oklahoma) 24 (11): 256.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5월 17일에 확인함.
↑“The Panama Canal Record”XIII (39). Balboa Heights, Canal Zone: The Panama Canal. 1920년 5월 12일. 584–585면. ... it was not until the year 1918, when the Governor of the Canal Zone addressed a communication to the Secretary of Foreign Affairs of the Republic of Panama stating tha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would require 50.6 hectares, that the exact area expropriated was definitely known.
↑Canal Zone. Office of the Governor. (1919). 《Annual Report of the Governor of the Panama Canal for the Fiscal Year ended June 30, 1919》.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94쪽. 2016년 5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A survey was made and a map drawn up showing the boundary lines of the Punta Paitilla military reservation. Various areas were determined with reference to high and low water and the old and new city boundary lines. Permanent monuments were set and a description written up by metes and bounds. A tracing was made of the map of the military reservation known as area 'A'.
↑Link to a download for the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 map of the Elkton Quadrangle from August 1900: [2]. Note that later reprints of the same map, as early as 1906, changed ownership of the Wedge to Delaware: [3]
↑The details of the project are contained in IBWC minutes 145 through 167.“Minutes 1 through 179”. International Boundary and Water Commission. 2015년 6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6월 22일에 확인함.
↑Metz, Leon C. (2010년 6월 12일). “Bancos of the Rio Grande”. 《Handbook of Texas Online》.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2016년 10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7월 13일에 확인함.
↑“IBWC Minutes”. International Boundary and Water Commission. 2017년 9월 1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