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홋카이도에서 두각을 나타낸 중학교 3학년 때 야마구치현호후시의 조부모 댁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고 다타라가쿠엔 고등학교(현재의 다카가와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오 대학에 입학했다. 동 대학 야구부에서 활약하며 도토 대학 리그 통산 107경기에 출전해 402타수 115안타, 타율 2할 8푼 6리, 2홈런, 28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4차례나 선정되었다. 통산 115안타는 후지나미 유키오의 133안타에 이은 리그 역대 2위 기록이었다.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3순위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 2년차인 1982년부터는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면서 이듬해 1983년부터 4년 연속으로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1984년에는 시즌 56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곤도 사다오가 감독으로 취임한 1985년에는 준족의 가토 히로카즈, 야시키 가나메와 함께 ‘슈퍼카 트리오’(スーパーカートリオ)를 결성했고 1985년부터 수비 위치는 야마시타 다이스케가 2루수, 자신은 유격수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다카하시 마사히로가 유격수 자리를 차지한 것에 의해서 1987년부터는 원래의 2루수로 돌아왔다. 그 전에 1983년에는 일시적으로 오른쪽 타석에 들어서며 스위치 히터가 되었지만 오른쪽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상태가 좋지 않아 곧바로 왼쪽 타석에 한 차례만 변경했다.[1] 1990년에는 타율 3할 2푼 3리를 기록하며 리그 2위가 되었고. 199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개인 통산 300도루를 달성했다.
1992년 시즌 종료 후 연봉에 관한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아[2] 연봉 조정을 신청했다. 그 결과, 다카기는 구단이 제시한 액수보다 몇 안 되는 성적을 남겼지만 이것이 다음 시즌의 방출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고 다카기는 그 후에 말하고 있다.
은퇴 직후 연예기획사인 선 뮤직과 계약을 맺고 연예인으로 변신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연예인으로서는 드라마와 가요 프로그램, 요리프로에도 출연하는 등 수수하고 말재주가 없는 캐릭터로서 활약을 했고 그 이후에는 후지 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었다. 2001년에는 요코하마의 내야 수비 주루 코치로 발탁되었지만 1년 만에 사임했고 다시 후지 TV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2003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 대표팀의 내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전에서의 패배한 것에 대해 “벤치에서 직사광선에 맞아 체감 온도가 10도 달랐다”라고 말했다.
2012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1군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2013년 시즌이 끝나고 계약하지 않았다.
다이요(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는 1993년에 요코하마(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
각주
↑스위치 히터였던 1983년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동점으로 맞이한 9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상대는 좌완 투수인 야마모토 가즈유키였다. 보통이라면 오른쪽 타석에 들어갈 것이 왼쪽 타석에 들어가면서 세이프티 스퀴즈로 성공시켰다. 이 경기를 계기로 오른쪽 타석을 버리고, 왼쪽 타석에 들어섰던 것으로 여겨진다.
↑3년 연속 타율 3할 대가 넘는 성적에 대한 근거로 연봉 상승을 주장하는 다카기에 대해서 구단 측은 작년부터 기여도가 떨어진 것을 이유로 낮은 연봉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