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중, 대신고, 연세대를 거치며 빠른 발과 투지를 앞세워 국내에서 유일하게 차범근을 막을 수 있는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돼 1974년 FIFA 월드컵 최종예선 호주전에 참가하나 아쉽게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 공군 축구단에서 차범근 등과 함께 군생활을 마쳤고, 주택은행과 대우 로얄즈에서 활동하며 선수 생활을 마쳤다.[1]
지도자 생활
선수를 은퇴한 후, 대우 로얄즈 트레이너, 아주대 코치, 대우 로얄즈 코치, 아주대 감독,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감독 순으로 지도자 코스를 밟으며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보냈다.
대우 로얄즈 코치 시절, 정해원, 이태호, 김주성 등의 선수를 앞세워 대우 로얄즈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아주대 감독 시절은 안정환, 우성용, 이민성, 신범철 등을 발굴해 전국대학선수권대회, 춘계, 추계 축구연맹전을 연달아 제패하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이에 대우 로얄즈 감독으로 초빙되어 최하위권을 맴돌던 팀을 아디다스컵 3위로 올려놓았으나 전기리그 4위에 그친 것 뿐 아니라 프런트와의 마찰 탓인지[2]1995년 전기리그 종료 뒤 중도하차했고 이후 명지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지대 감독직을 수락하기 전, 대학 총장에게 "우수한 선수를 발굴해낸다면 성적이 좋지 않아도 된다"는 확답을 듣는다. 이후, 박지성, 손대호, 정광민, 박재홍 등의 선수를 발굴하며 대한민국 축구에 기여했고 1996년 말 대우 감독 복귀설이 있었으나 프런트와의 마찰로 팀을 떠난 과거 탓인지 불발됐으며[3] 안양 LG(현 FC 서울) 감독 물망에도 올랐지만[4] 대학 잔류를 선택하여 무산됐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마친 후,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가 김희태 축구센터를 설립, 선진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구축한다. 일동초, 일동중, 일동고 등 초중고를 포괄하는 선진 축구 클럽형 센터를 설립했고, 현재는 일동중, 이동중, 일동고의 축구부를 운영하고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