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1]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사야가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2]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3] 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와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조선 이름을[4] 하사받고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5]
귀화한 후에는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사야가는 귀화한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6]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7] 그 밖에도 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과 교류했는데, 그 중에는 이덕형, 정철, 류근, 권율, 조호익, 김성일,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김응서 등이 있다.[8]
임진왜란 이후 행적
임진왜란 이후 야인(野人)들의 침입이 잦자 변방(邊方) 방어를 자청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9]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大邱)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1642년(인조 20년)에 사망했다. 사후 삼정산(三頂山)에 묻혔으며,[10] 그 뒤 녹동서원(달성군가창면 우록리에 있음)에 배향되었다. 1798년(정조1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에 재건되었다.
결혼과 후손
그는 1600년(선조 33년)에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 장씨와 결혼해 이후 아들 다섯 명과 딸 한 명을 두었다.
현재까지도 김충선의 후손들이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녹동서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