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해(楷), 자는 인표(仁表),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 능호는 장릉(長陵). 예종과 순덕왕후 이씨(順德王后 李氏)의 맏아들이다.
생애
인종은 1109년, 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5년(예종 10년) 음력 2월,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1122년 음력 4월 예종의 뒤를 이어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즉위 초에는 이자겸이 정권을 틀어쥐고 인종을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 즉 인종의 이모들을 모두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이러한 이자겸의 횡포에 반기를 품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이자겸이 과거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과 손을 잡고 권세를 부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자신이 공공연히 왕이 될 것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곧 멀어지고 그사이 척준경은 인종과 가까워진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南宮)에 파천하였으나,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영광에 귀양 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귀양 갔다.
인종은 개경의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과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내부적으로 쓰이던[출처 필요] 황제의 칭호를 대외적으로도 칭하며, 이와 함께 연호를 쓸 것을 인종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의 금나라가 고려를 심히 견제하자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고, 어떻게든 인종이 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묘청이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인종은 점차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에게 황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평가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예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김부식 등에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고려사》 권129, 열전 권제42, 반역(叛逆), 최충헌(崔忠獻)
최충헌이 최충수를 처단하여 권력을 독점하다이전에 태자(희종)가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비(妃)로 맞았는데, 이때에 와서 최충수(崔忠粹)가 자신의 딸을 태자에 바치려고 왕에게 굳이 청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았다.
최충수가 거짓으로 내인(內人)에 말하기를,
“왕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내인이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어쩔 수없이 태자비를 내보내었다.
태자비가 흐느껴 울고 목이 메이기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니, 왕후(선정왕후)도 눈물을 흘렸으며 궁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