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정(禎),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몽골어: Putashiri[2], 한자: 寶塔實里 '보탑실리')이다.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혜(忠惠)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이다. 충숙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의 아들이다.
생애
1330년(충숙왕 17년), 충숙왕이 원나라에게 폐위되자 즉위했지만, 1332년(충혜왕 2년)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충숙왕이 복위되어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충숙왕 후7년)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사촌 심양왕왕고(王暠)를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曺頔) 등의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했다. 즉위 후에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았다.
그해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를, 8월에는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 충혜왕은 서모인 권씨나 경화공주 뿐만 아니라, 외숙 홍융(洪戎)의 처까지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전혀 없고 패륜을 일삼았다. 장인인 홍탁의 후처 황씨가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 이는 충혜왕에게 옮아서 그렇다는 소수의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343년(충혜왕 후4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강간과 음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였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최후
폐위 및 사망
1343년(충혜왕 후4년) 11월 22일, 원나라는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충혜왕의 측근들을 잡아 원나라로 끌고 갔다. 그 해 12월 21일, 게양현으로 유배가라는 명을 받고 유배지인 게양으로 가던 도중, 1344년 1월 15일 악양현(岳陽縣, 현재의 중국후난성웨양시)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
너 왕정(王禎)은 왕이 되었으면서도 백성을 매우 심하게 착취하였으니, 비록 너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먹인다고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너를 게양으로 유배 보내는 것이니,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가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