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북부는 완만한 언덕이 계속되는 기비 고원의 일각을 이루고 있고 시민의 취수원인 아사히카와 댐과 편리성 덕분에 이용객이 증가하고 있는 오카야마 공항 및 근교 주택가가 있다. 세토 내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사히가와 강과 요시이 강의 운반·퇴적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남부의 오카야마 평야에 중심 시가지가 위치하고 있고 평야의 남부에는 에도 시대 이후의 간척지에 농지가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그 남쪽은 고지마 만을 사이에 두고 세토 내해가 보이는 풍광이 맑고 아름다운 고지마 반도의 구릉지를 이룬다.
기후
북쪽은 주코쿠 산지, 남쪽은 시코쿠 산지에 끼어있는 세토 내해 연안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세토 내해식 기후에 속한다. 온난하고 일조 시간은 연간 약 2000시간으로 길며 연 강수량은 1100mm정도로 비와 눈은 일본 전체에서로 보았을 때 매우 적다.
봄과 가을에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은 날이 많고 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 여름에는 세토 내해 연안 특유의 고요가 일어나기 때문에 열대야가 발생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매년 몇 번씩 일본 열도에 내습하는 태풍이나 그 영향에 의한 풍우도 주고쿠 산지와 시코쿠 산지의 산들에 의해서 약해지는 경우가 많아 재해에 휩쓸리는 일은 적다. 또 겨울에 있는 북동 계절풍이 주고쿠 산지에 의해 차단되기 때문에 강설은 적고 눈이 내렸을 경우도 쌓이는 일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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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대부터 율령시대까지
고대의 오카야마는 기비 국의 일부로 야요이 시대와 고훈 시대에는 쓰쿠시·이즈모·야마토·게노 등과 함께 일본 열도를 대표하는 정권으로서 번영해 야마토와 연합해 열도의 통일·치세에 공헌했다.
그러나 기비의 융성을 기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야마토에 배신당해 세력이 삭감되어 비젠국·빗추국·빈고국·미사사카 국으로 분할되었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문화면에서 밀접한 구 기비 국의 정치적인 통일은 달성되지 않았다. 기비 국이 분할된 후 비젠 국의 국부는 현재의 오카야마 시역 내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센고쿠 시대부터 덴쇼(1573년)기까지
오카야마 주변은 무로마치 시대까지는 농촌 지대로 16세기에는 가네미쓰 씨가 소규모의 성을 쌓아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센고쿠 시대에 오카야마의 교통의 편리함과 토지의 광대함에 주목한 우키타 나오이에은 1570년에 가네미쓰 무네타카를 모반 혐의로 할복 자살시키고 오카야마성을 빼앗았다. 그 후 성을 대규모로 확장해 산요도를 오카야마를 경유하게 바꾸고 비젠 국내외의 상인을 불러와 1573년에 본거지로 이주시켰다. 나오이에가 시작한 성시·오카야마의 진흥은 우키타 히데이에의 대에도 계속되어 이때 이후 오카야마는 주로 비젠 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시로서의 오카야마는 발전을 계속해 이케다씨 4대의 이케다 쓰나마사의 대인 1707년에는 도시 인구가 3만 635명(무가·절과 신사를 포함한 총인구는 추정 4~5만 명)에 이르러 일본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경제력을 가진 성시가 되었다. 고라쿠엔이 조성되었던 때도 이 시기이다. 그런데 도시 인구는 교호 무렵부터 서서히 감소해 막말에는 2만 92명(1858년)이 되었다. 이것은 오카야마번의 신전개발에 의한 농촌 상업의 발달과는 대조적이며 번 당국이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한 것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유신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1871년8월 29일의 폐번치현에 의해 오카야마는 오카야마 현의 현청 소재지가 되었고 1889년에는 시제를 시행했다. 시가 성립될 당시 면적 5.77 km2, 인구 4만 7564명이었고 1920년의 인구는 9만 4585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의 1945년6월 29일의 오카야마 공습으로 큰 피해를 받아 1000명 이상이 희생이 되었고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후의 혼란기인 1952년4월 24일, 오카야마 시 관공서 앞에서 외국인 200명이 오카야마 시 공안 조례를 위반하는 무단 데모(오카야마 사건)가 발생했다. 청사에 최루 가스병과 돌을 던져 달려온 경찰관 2명이 외국인이 소지하고 있던 죽창에 찔려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혼란기를 지나 도시는 순조롭게 발전해 주변 시정촌과의 합병을 진행하였다. 1960년 경에는 구라시키시를 포함한 겐난 광역 도시의 구상을 오카야마 현 지사가 제창했지만 구라시키 시장의 실종에서 시작된 소동에 의해 백지 철회되었다. 1972년3월 15일에는 산요 신칸센오카야마역이, 1988년3월 20일에는 세토 대교선이 개업한 이래 철도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1996년에는 국가로부터 중핵시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05년3월 22일에 인접하는 미쓰 군 미쓰 정, 고지마 군 나다사키 정의 2정을 편입하였고 2007년1월 22일, 인접하는 미쓰 군 다케베 정, 아카이와 군 세토 정의 2정을 편입했다. 2007년 6월 26일 저녁에 시의 인구가 70만명을 돌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