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광해군은 강홍립과 김응하에게 1만 3000명의 군대를 내어주었다. 또한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적대적인 여진 부족이었던 예허에게도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명나라군 8만 8000명, 조선군 1만 5000명, 예허군 2000명이 사르후에 집결했고 그 규모가 10만 명에 달했다. 요동총독 왕가수, 요동순무 주영춘, 순안어사 진왕정이 작전을 검토해 4개 부대로 나누어서 누르하치의 후금군을 공격했다.
명나라와 금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전투가 사르후에서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명나라군과 여허군은 완전히 대패했고 조선군도 많은 피해를 냈다. 김응하 장군이 전사하였고, 강홍립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금에게 항복하였으며 양원과 이여백은 후퇴하였고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격파당했다.
명나라 공식 발표한 피해는 유정 등 314명의 장수가 전사, 약 4만 5870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말 2만 8400필을 잃었으며, 무기 손실은 셀 수도 없었다고 한다. 4만 명의 군사만 살아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후에도 명의 엄청난 저력으로 인해 많은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로 대략적인 판세가 금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밀리는 명나라
그 때 명나라 안에서도 혼란스러웠다. 1620년만력제가 죽고 태창제 즉위했으나 몇 달 뒤 신하에 의해 독살당해 천계제가 즉위했다.
1621년 3월 금은 명나라군을 요동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선양을 점령했으며, 수도를 선양으로 옮겼다. 1621년 5월에 선양이 점령되자 모문룡이 군대를 이끌고 금군을 대상으로 유격전 등을 시행하며 많은 피해를 입혔다.
1626년누르하치는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성에는 최신 대포인 홍이포가 설치되어있었고 이를 모르던 금은 돌격전술로 일관하였으며 많은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누르하치도 부상을 입었다. 일설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포격으로 인한 부상으로 그 해 여름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아들 홍타이지가 즉위했다. 1627년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쟁을 잠시 미루고 3만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금은 1629년명나라에 붙어 저항하던 내몽골 차하르 추장 임단한까지 격파하고 완전한 만주 지배권을 확보한다.
1633년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군사 1만 40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금군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1636년홍타이지는 국호는 청나라로 바꾸고 12만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전쟁에서 홍타이지는 조선왕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홍타이지의 죽음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은 밀운성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하여 50성을 공략하고 8성을 항복시켰으며 46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이 난공불락 요새라 더 이상은 남하하지 못하고 대신 1640년 금주성을 포위했다.
이에 명의 군대가 금주성을 구하려 홍승주와 오삼계 등이 송산성에 집결했으나 청군의 대공격으로 크게 패해 명군 5만 4000명이 섬멸당하고 송산성과 금주성은 물론 산해관 외성도 함락당했다.
홍타이지1643년 뇌출혈로 사망하고 후계자 문제를 논의했는데 동생 도르곤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으나 도르곤은 순치제에게 자리를 양보해 순치제가 즉위했다.
당시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폭력적인 황제로 신하들을 맘대로 죽였고 1630년 8월에는 모문룡을 죽였던 원숭환을 처형했다.
점점 국력이 약해지던 명나라는 1644년 청나라의 공격이 아닌 내부 반란으로 인해 급속도로 쇠락한다.
바로 이자성의 난으로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은 시안, 개봉, 낙양을 점령하고 뒤이어 북경에 입성해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숭정제는 도망쳐 황후와 딸을 죽이고 메이산 산에서 자살했다. 그때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50만 명나라군 때문에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이자성의 난을 들은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고 연합해 오삼계의 정병 4만 명을 포함한 18만 명의 도르곤 군대가 이자성을 격파하고 윈난성 왕이 된다.
중국 북부 후베이성으로 도망갔던 이자성은 1645년 그곳 주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대부분 장악했다.
명나라 부흥 운동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1644년홍광제가 난징에서 사가법 등에 의해 옹립되어 남명으로 이어져 청나라에 대한 대립과 저항을 계속했으며 뒤이어 정지룡 등에 의해 2대 황제 융무제가 올라 각지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의군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