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치는 무투표 당선을 강력히 원했다. 그래서 굉지회를 막 계승한 가토 고이치를 회유하기 위해 차기 총재 자리를 은연중에 암시했다. 하지만 가토는 이를 무시하고 맹우이자 근미래정치연구회를 이끌던 야마사키 다쿠와 함께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가토는 차기 총재 후보 중에서도 유력한 정치인이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낙선을 하더라도 출마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오부치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사태는 여기서 진정되지 않았다. 오부치는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가토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고 당선 이후의 당직·내각 인사에서 굉지회를 철저히 냉대했다. 이는 다음 해 가토의 난을 유발한 원인이 된다.
한편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는 회장인 모리 요시로가 당시 간사장이었기에 현직 총재가 재선에 도전하는 이상 이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어 파벌 전체를 오부치 지지로 이끌었다. 총재 선거에 이미 두 차례 출마한 적이 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가토·야마사키와 함께 YKK로 불릴 만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 둘을 지지하기보다는 파벌 회장인 모리의 뜻을 좇았다. 이후 모리는 오부치 사후 총재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파벌 회장이 된 고이즈미는 가토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1999년 총재 선거는 이후 자민당을 둘러싼 정치적 움직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거였다. 참고로 이때 모리에게 강력하게 출마를 종용한 인물이 당시 재선 의원이던 아베 신조였다. 아베는 훗날 "우리 소장파 의원들의 요구대로 모리 씨가 대항마로 출마했더라면 후계 수상이 되지 못했을 거다. 그때 출마한 가토 씨는 결국 수상이 되지 못했다."라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