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까지 올림픽 축구 대회는 축구 세계 선수권으로도 통용되었고, 1920년(14개국), 1924년(22개국), 그리고 1928년(17개국) 대회 모두 1930년 초대 FIFA 월드컵보다 참가국 수가 많았다. 그로 인해 축구의 행정을 담당하는 국제 축구 연맹은 비록 대회를 직접 주관하고 운영하지만, 올림픽 취지와 대조되는 행보를 보였다.
당시 올림픽 참가 선수들은 아마추어 지위를 유지해야 했는데, 이와 대조되게 축구계는 프로 활동이 대세가 되었다. 결국 FIFA는 프로 무대가 활성화된 나라들의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 올림픽에 모든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들의 요건이 충족하려면 선수들은 국가 협회의 비정기적인 급여만 받아야 했다: 소위 '비정기적 급여'는 수입을 포기하고 불가피한 지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28년 2월 17일, 영연방 4개국 협회는 위의 행위를 단행한 FIFA에서 탈퇴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4개국 협회는 "원하는 방식대로 독자적으로 활동해도 좋다."고 봤다.[2]프랑스 축구 연맹앙리 들로네 회장은 FIFA가 올림픽 외의 국제 대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들로네는 FIFA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오늘날 국제 축구계는 올림픽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다수의 나라에서 프로 무대가 들어서고 조직되었으며, 더 이상 최고 선수들을 대회에 참가시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3] 대회 전날인 1928년 5월 26일, 쥘 리메가 참가한 암스테르담의 FIFA 회의에서 1930년에 새 FIFA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는 쪽에 투표하였고, 모든 회원국에게 참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이탈리아, 스웨덴, 네덜란드, 스페인, 그리고 우루과이 모두 대회 유치를 시도했다.
1926년은 영연방 협회가 국제 축구 연맹에 아마추어 선수 정의 수용을 요청한 지 3년이 되는 해이나, FIFA는 거절했다. 로마 회의는 영연방과 덴마크 협회를 다시 가입시키기 위해 열렸지만 큰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비정기적 급여를 주장하던 스위스 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각국 협회들이 규정한 이례적인 경우가 아닌 경우 비정기적 보수 지급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중앙집권화된 FIFA 당국과 축구 협회 간의 마찰이 있었다. 1927년, FIFA는 올림픽 위원회에 비정기적 급여를 참가 선수들의 급여 해결에 한정할 것을 요청했다. 영연방 협회는 이후 올림픽에서 철수하였고, 이후 FIFA에서도 탈퇴했다.(Association Football (1960))
우루과이는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고, 아르헨티나 또한 우루과이와 마찬가지로 우승후보로 분류되었다. 1924년에 우루과이 선수단이 귀국했을 때 아르헨티나와 두 차례의 경기를 벌일 것을 수락했다. 아르헨티나 지지자들은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에게 투사체를 투척해 경기장 한가운데에 머무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4] 전 대회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우루과이는 국내 두 주요 구단인 나시오날과 페냐롤에서 선수들을 대규모로 차출했다.
유럽 국가들
1924년 대회와 비교해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10개국(총 17개국 중)이 네덜란드에 선수단을 파견했다. 이탈리아는 1925년부터 단 2번밖에 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아우구스토 랑고네 감독은 1923년에 협회가 손실을 보상한 것에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대회 2년 전부터 그의 공격진은 거의 비슷하게 기용되었다: 아돌포 발론치에리, 비르질리오 레브라토. 비록 아르헨티나 태생 훌리오 리보나티가 대회 전에 빠지게 되었지만 안젤로 스키아보가 그의 빈 자리를 채웠다. 스페인 또한 전번 올림픽 이래 단 1번밖에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 경기를 치르고 나서 경험 많은 주장 페드로 바야나를 잃게 되었다.
대회 본선
우루과이는 첫 경기부터 개최국 네덜란드를 40,000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2-0으로 이겨 전 대회에서 논란의 승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장 랑게뉘 주심은 이 경기를 잘 제어하여 찬사를 받았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미국에 11-2의 무난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8강전에서 우루과이는 독일을 4-1로 이겼다. 또다른 8강전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만났다. 둘은 본 경기에서 스페인의 막판 동점골로 승부를 내지 못하면서 재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사흘 후 벌어진 재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전반전에만 4골을 폭격했다. 랑고네는 큰 변화를 주지 않고 기존 선수들을 신뢰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스페인은 2명의 선수를 교체한 이탈리아와 대조되게 5명의 출전 선수를 바꾸는 강수를 두었다. 포르투갈은 칠레(4-2 승)와 유고슬라비아(2-1 승)[5]를 이기고 이집트에 1-2로 패했다. 아프리카 대표로 출전한 이집트는 아르헨티나와 준결승전에서 맞대결을 벌였다.
준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우루과이를 상대했다. 이탈리아는 잔피에로 콤비를 골문 앞에 안젤로 스키아비오를 최전방에 배치했다. 이 두 선수는 훗날 1934년 월드컵에서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전반 종료를 앞두고 앞서나갔다. 레브라토의 후반전 만회골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경기를 뒤집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하늘색 군단이 페드로 세아, 엑토르 스카로네의 앞서나간 골을 잘 지켜내 결승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