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리지는 국내 경제의 호황에 공적이 있다고 여겨졌고, 외교 문제에서도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의 분열도 선거의 승리에 큰 요인이 되었다. 민주당의 정식 후보는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으로 지명도가 낮은 전직 하원 의원인 외교관 존 W. 데이비스였다. 데이비스는 보수파였기 때문에, 민주당의 개혁파는 탈당하여 진보당 후보로 출마한 (과거 공화당 출신인) 위스콘신 상원 의원 로버트 M. 라폴레트 시니어의 제3당 운동을 지원했다. 이 대통령 선거는 미국 원주민이 모두 미국 시민이 되어, 투표권을 획득한 첫 번째 기회였다. 쿨리지가 일반 투표에서 득표율로 25.2 포인트의 차이를 낸 것은 지금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째로 큰 차이가 되었다. 가장 큰 차이는 1920년의 워런 하딩의 26.2% 차이었다. 이 선거는 동시에 미국 민주당이 역사상 최저의 득표율(28.8%)을 낸 선거로 남았다. 그러나 선거인단에서는 1920년 대선에 비해서 더 선전하였는데, 민주당은 켄터키를 잃고 테네시와 오클라호마에서 이겼다.
후보선출
공화당
1924년 6월 12일, 공화당 전당대회는 압도적인 지지로 쿨리지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비참한 민주당 전당 대회 결과 민주당은 분열했고, 쿨리지가 선거에 승리할 것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선거 슬로건 “쿨리지처럼 쿨하게”는 매우 인기를 끌었다. 데이비스는 전통적인 민주당의 기반인 솔리드 사우스와 오클라호마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그쳤다. 민주당의 개혁파가 라 폴렛에 투표했기 때문에 데이비스는 선거에서 쿨리지에 25%의 차이를 패배했다. 공화당은 선전을 거두며, 뉴욕시도 승리를 거두고, 이후 재현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업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