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시는 중요한 군사적 목표는 없었지만 호쿠리쿠 본선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지이자 후쿠이현의 현청이 있는 곳이며 호쿠리쿠 지역의 상업 중심지었다. 또한 일본의 전쟁 노력에 중요한 여러 소규모 산업단지가 모여 있었다.
공습
1945년 초 미국 육군 항공대(USAAF)는 일본 본토의 태평양 연안 본토 지역의 목표물 폭격에 집중했다. 태평양 연안 지역의 도시들은 인구가 많고 산업화되었으며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와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1945년 7월 12일 밤 쓰루가시가 폭격당하면서 동해 연안 지역의 도시들도 폭격당하기 시작했다. 당시 쓰루가의 대공 방어 시설은 거의 없었고 소이탄 폭격으로 쓰루가 시가지 70% 이상이 파괴되었다.[3]
이로부터 일주일 후에 후쿠이가 공습당했다. 1945년 7월 19일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133기가 마리아나 제도 티니언섬에 이륙하여 현지 시각 23시 24분에 후쿠이에 도착했고 도착 당시에는 맑은 밤하늘이었다.[4]후쿠이성 유적 서북쪽을 중심으로 반경 1.2 km 내 지역에 소이탄 865 t 이상이 투하되었다. 폭격으로 발생한 화염폭풍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5] 후쿠이시의 민방위가 내건 조치는 매우 조잡했다. 후쿠이의 방공호는 땅에 구멍을 파고선 나무로 지붕을 덮은 목조건물 위에 얉은 흙과 진흙을 덮은 급조된 형태였다.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폭풍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7월 19일 공습으로 발생한 사상자는 1,756명 사망(여성 915명, 남성 661명), 6,527명 부상이며 부상자 중 107명이 나중에 사망했다. 또한 폭격으로 시가지에 있던 건물 25,691채 중 21,992채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총 인구 103,049명 중 85,603명이 난민이 되어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이 집을 잃었다. 종전 1년 후 미국 육군 항공대가 분석한 전략폭격 사후조사에서는 후쿠이 공습으로 후쿠이 시가지의 84.8%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분석했다.[6]
Bradley, F. J. (1999). 《No Strategic Targets Left. Contribution of Major Fire Raids Toward Ending WWII》. Turner Publishing. ISBN978-1-56311-483-0.
Carter, Kit C. (1975). 《The Army Air Forces in World War II: Combat Chronology, 1941-1945》. DIANE Publishing. ISBN978-1-4289-1543-5.
Crane, Conrad C. (1994). 《The Cigar that brought the Fire Wind: Curtis LeMay and the Strategic Bombing of Japan》. JGSDF-U.S. Army Military History Exchange. ASIN B0006PGEIQ.
Grayling, A. C. (2007). 《Among the Dead Cities: The History and Moral Legacy of the WWII Bombing of Civilians in Germany and Japan》. New York: Walker Publishing Company Inc. ISBN978-0-8027-1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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