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동안에 푸아투는 귀족과 부르주아층에 위그노 (프랑스 칼뱅주의자)들의 본거지였고 프랑스 종교 전쟁 (1562년–1598년)으로 인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1604년 초에 현재 노바스코샤 주, 그 이후에는 뉴브런즈윅 주에 정착한 많은 아카디아인들은 푸아투 출신들이였다. 1755년이 시작될 무렵에 아카디아인들은 영국에 의해 추방당했고, 그 일부는 퀘백으로 대피했다. 이 난민들의 대다수는 1785년에 루이지애나로 추방당했고 최종적으로 케이준인 (아카디아 출신)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1685년 낭트 칙령 철회 이후,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의한 반종교 개혁 활동이 강성해졌고; 이는 1793년 바푸아투 (Bas-Poitou, 방데 주) 지역에서 프랑스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3년간의 열린 반란으로 이어졌다. 추가적으로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동안에 방데 주에는 루이 18세의 왕정 복원주의자들이 머물렀고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가 휘하의 10,000명의 부대를 보내기도 했다.
랑페르가 지적한 것처럼 "17세기 푸아투의 위그노 지도자와 18세기 후반 방데 지역이 그렇게 되게 한 맹렬한 가톨릭 성향의 저항적인 왕정주의자들은 서로 매우 다른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었다. 저 두가지를 연결하는 공통적인 맥락은 지역 정체성에 대한 권리 주장과 그 구성과 정체성은 무엇이든간에 파리 중앙 정부에 대한 반대였다. (...) 루이 13세와 루이 14세가 흔들림없는 저항을 겪은 이 지역에서 부르봉 가문은 왕위를 잃었을 때 충성스럽고 호전적인 지지자들을 얻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새로운 중앙 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