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성 태생으로 북양군벌의 장군으로 경력을 쌓았다. 1911년의 신해혁명 때에도 위안스카이 휘하에 있었다. 당시는 청나라 소속이었으므로, 처음에는 혁명군을 공격하였으나, 혁명이 성공하고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총통이 된 후에는 직례총독이 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하자 펑궈장은 이에 반대를 하였고,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펑궈장은 예상 후계자 목록에도 들지 못하게 된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에 리위안훙이 총통이 되고, 펑궈장은 부총통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장쉰, 캉유웨이 등이 벌인 선통제 복위사건이 벌어져 약 열흘간 선통제가 실제로 복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 리위안훙이 퇴임하고, 펑궈장이 7월 17일부터 1918년10월 10일까지 총통이 된다. 하지만 당시 의회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임시직이었다.
당시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독일이 장쉰의 쿠데타를 측면지원한 것이 알려지자 중국은 대전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1917년 9월 쑨원이 광저우에 새로운 정부를 열고 베이징에 반대하기 시작한다. 당시 안휘파 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쑨원의 혁명파에 대한 강경 입장을 고수했을 뿐만 아니라 펑궈장의 직례 군벌과 계속 대립하였다. 펑궈장은 혁명파와의 평화적 사태해결을 위해 돤치루이를 실각시켰지만, 안휘 군벌의 요구로 다시 총리직에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펑궈장은 위안스카이와 리위안훙의 자리를 승계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원래 임기가 시작되는 1913년부터 세어 5년이 되는 1918년10월 10일에 퇴임하게 된다. 이후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