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리버풀에서 출생하여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를 졸업하였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833년보수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필 내각 때에 관세 개혁을 하여 자유무역의 길을 열었다. 또한 1852년 애버딘 연립 내각의 재무상이 된 후, 1853년에 획기적인 예산안을 성립하여 재정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아편전쟁 반대
1840년아편전쟁을 할 것인지를 놓고 하원에서 논의할 때에 전쟁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청나라 관리였던 임칙서가 영국상인들로부터 마약인 아편을 압수하여 소각하는 상식적인 행정명령을 시행하였음에도, 당시 영국인의 치외법권 문제나 아편무역으로써 무역적자를 풀려고 한 영국의 배금주의 등이 겹쳐 영국 정부는 청과 명분이 부족한 전쟁을 하려고 했다. 이에 하원 회의장에서 글래드스턴 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저는 아편도 경제도 잘 모릅니다. 그 나라 법을 따르지 않는 외국인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것만큼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린 전쟁은 없었다고 기록할 것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1]
글래드스턴 의원의 연설은 전쟁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용기를 내도록 하여, 당초 파병이 우세해보이던 초기 상황과 달리 1840년4월 파병안 최종 투표 결과는 전쟁 찬성의견과 반대의견이 찬성 271:반대 262로 매우 팽팽하게 나왔다.[2] 허나 결과적으로 찬성이 약간 더 우세하여 전쟁은 벌어지고 글래드스턴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다만 이때의 일로 그는 많은 지지층을 얻게 된다.
자유당 내각에서는 그는 교육 제도를 고쳐 영국사람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의무교육) 또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등 많은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참고로 디즈레일리가 이끌던 당대 보수당도 친노동 스탠스의 온건적 보수주의를 내세웠는데,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예기치 못하는 혁명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글래드스턴은 1894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하워든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 (The Great commoner) 으로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