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 후 태조는 강씨를 현비로 책봉해 수비(首妃: 으뜸 왕비)로 삼고, 한씨에게 절비(節妃)의 시호와 제릉(齊陵)이라는 능호를 주어 추증 왕비[1]로 삼아 차비(次妃)로 삼았으며 강씨 소생의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별하여 막내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강씨가 사망하여 태조가 강씨를 왕후로 추봉[2]하니 비록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한씨는 후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또한 태조는 개국 초 군권분장정책에 의해 왕자와 종친 및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으며[3], 이에 반발한 한씨 소생 왕자들이 동복 형제들 및 종친들과 결탁해 태조 7년(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4]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이 살해되고 한씨 소생 둘째 아들인 이방과가 왕세자로 등극하였다가 한달 뒤 즉위하니 그가 곧 정종이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정종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난을 이으킨 이유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함이었음을 명분으로 하여 동시에 이복이지만 친아우들을 살해한 패륜의 책임을 당장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무장으로서는 탁월했지만 정치적 감각은 그보다 부족했던 형 정종에게서 자리를 양도받을 자신이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당시는 아직 건국 초창기여서 병권이 국가에 집중되지 못하였고, 군권분장정책에 의해 왕자들과 종친들이 절제사로 임명되어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두 차례 난의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난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낙착되었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모든 군대를 국가의 군대로 통합하게 되었다.
각주
↑추증 왕과 추증 왕비는 명예직에 불과하여 실제 왕이나 왕비보다 격이 낮으며 태묘(太廟: 종묘)에 부묘될 수 없고 무덤의 단장 및 제사도 격을 낮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