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촉(後蜀, 934년 ~ 965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전촉의 뒤를 이어 사천성을 지배하던 국가이다. 촉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의 꽃을 피웠다.
문화
전촉과 마찬가지로 사천지역은 전란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몰려온 수많은 문인이나 지식인들이 모여, 동쪽의 오, 남당과 더불어 오대십국 시대 최고봉의 문화를 활짝 피웠다.
후촉의 대표적 문인으로써 화가 황전(黃筌), 시인 모문석(毛文錫), 구양형(歐陽炯) 등이 열거할 수 있다.
황전은 전촉, 후촉의 2왕조에서 궁정화가로써 일한 인물로 화조화(花鳥畵)가 특기로 훗날 송나라대에는 황조와 남당의 화조화가 서희(徐煕)와 더불어 화조화의 기본이 되었다.
모문석과 구양형은 이 시대 일반적이지 않은 장르인 사(詞)가 주요한 작품이었다. 그때까지 시(한시(漢詩))와는 다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노래처럼 읊어지는 것이 사(詞)였다. 사(詞)는 그때까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연애와 성적인 것을 소재로 한 작품(염사(艷詞))도 많아 그 시대 의식이 매우 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문석도 황전과 같이 2왕조를 섬긴 인물이었고, 구양형은 후촉의 재상까지 지낸던 인물이었다. 달리 본다면 이러한 문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촉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시대 시인의 작품은 당나라말기 836년부터 940년까지 각지에 읊어지던 시와 사(詞)을 모아 편찬한 시집 [화간집](花間集)으로 모아지게 되고, 구양형이 서문(序文)을 썼다고 한다.
오(吳, 902년 ~ 937년)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써 당나라 절도사 양행밀(楊行密)이 양쯔 강 하류 금릉(金陵; 현재의 난징)을 중심으로 강소성, 안휘성, 강서성을 지배했던 나라이다.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이변(李昪)에 의해 제위를 찬탈당해 남당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 국호가 오나라였지만 춘추시대 오(吳)나라와 삼국시대 손권의 오(吳)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양오(楊吳)라 부르고, 이 명칭은 양(楊)씨가 지배한 오나라는 호칭이다. 또 다른 명칭은 남오(南吳), 회남(淮南)이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남당(南唐, 937년 ~ 975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중 하나로 오의 실권자였던 서지고(후에 이변(李昪))가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국가이다. 수도는 금릉(金陵,현재의 난징)이고, 국호는 당(唐)이었으나 당나라 라고 불린 기타 정권들과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이 나라 이름은 남당(南唐)이라고 불렀다.
10국 중 가장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였으나, 화북의 후주와 송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다만 문화, 경제적으로는 크게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문화
오대십국 시대 화북에서는 이민족의 침입이 있어 전란이 잇달았다. 그 때문에 화북에서 살았던 문인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남당도 이런 문인들을 받아들여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경, 이욱이란 2명의 남당 군주는 남당 이주(南唐二主)라고 칭해지면서 사(詞, 한시에서 쓰이던 시의 일종으로 절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의 명인으로써 알려져 있다. 거기에 이욱은 중국문학사상 최고의 사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
회화방면에서는 징심당지(澄心堂紙)라고 알려진 최고의 종이가 개발되어, 기교(技巧)를 굳힐 수 있는 벼루가 만들어졌다. 이 시대 이전에는 벼루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나, 벼루가 예술품적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남당문화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산수화(山水畫)의 명화가로 알려진 동원(董源)도 이 나라를 섬겼다. 서현, 한희재(韓煕載)등도 명문가(名文家)로 알려져 있다.
경제
남당은 강남지방을 안정적으로 지배하여 이 땅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후에 남송시대에 이 지역은 대 곡창지대가 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부터 개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회남에서 제염(製鹽)사업을 진행하여 국가의 재정은 윤택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전(銅錢)을 사용하였으나, 남당은 964년부터 철전(鐵錢)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철전을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가치있는 동전만을 사용하였기에 매매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철전과 동전은 등가(等價)를 매겨, 실제 상업상의 사용에서는 철전 10개에 동전 1개의 가치로 등급을 매겨 운용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도 이것을 인정하고 철전 10개에 동전 1개로 가치를 매겼다고 한다.
초나라는 차를 중심으로 교역을 벌여 번영한 상업국가였다. 차의 매매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었고, 견직물 생산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납세를 비단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국내에서만 통용된 화폐였던 연전(鉛錢)을 만들었고, 외국 화폐를 갖고 있는 것을 금지하는 등, 자산의 집중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