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동제사에 가입하고, 동제사에서 신규식 등이 개설한 박달학원에 다니며 수학하였다.[2]1913년상하이로 가서 오송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항해과에 들어갔다. 오송 상선학교에서 1년간 배운 뒤 학교장의 추천으로 남경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였다. 남경해군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군해군소위에 임명되어 중국해군본부에서 해군원수살진빙(薩鎭氷) 사령관의 전속부관장교로 근무하였다.
1915년 오송 등지 군사시설인 무선전신국에서 활동하였고,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1919년에 북경에서 김복희와 결혼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서면 제출한 데 분개하여,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신채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
임정 이탈 이후
1921년 비밀리에 조선으로 들어와 죽마고우인 이우식(李祐植)을 만나 학비 후원자를 소개받기도 했다.
1948년 귀국 직후 1949년 12월 19일대한청년단 결성때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4] 이후 대한청년단 단장과 교통부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1949년 제2대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제2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승만은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우대하였는데,신성모는 런던 유학으로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귀국 즉시 그에게 제독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당시 그는 영국 상선의 선장과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 이사 등을 지냈지만 중국에서의 군사 훈련을 받은 점과 중화민국해군제독 살진빙(薩鎭氷)의 부관으로 있었다는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는 점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해군중장의 계급이 부여되었고, 그는 신성모 제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직 당시인 1949년7월 17일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 발언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발언이 오해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해 9월초에도 "때 오기만 기다릴 뿐이고 밀고 갈 준비는 이미 됐다"고 주장했다.[5]
그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지만 이범석, 지청천, 김홍일 등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환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 업무와 통신관련, 통역관련 일에 종사하였던 까닭인지도 모르겠으나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에 일원으로서 국민의 안전을 돌보아야 될 그의 직분과 완전히 다른 거취를 보인다.[8] 한국 전쟁 발발 당시에는 합참의장을 겸직한다.
1951년에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金宗元)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세칭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국회가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한 결과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신성모는 이를 무마하려다가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51년 제5대 주일본 수석공사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일본 공사관 부임을 놓고 내무장관 조병옥, 총리 장면 등이 반대했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윤보선 역시 국민 방위군사건과 거창 사건을 두고 그의 도덕성을 언급하며 반대하였으나 이승만대통령은 이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신성모의 일본공사직을 관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