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동(上峴洞)은 경기도용인시수지구의 법정동이다. 본래 용인군 지내면 상현리였다. 동서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43번 국도(포은대로)가 북동 방향에서 남서 방향으로 가로지른다. 43번 국도 주변으로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으며, 용인시 서단에 위치한 신도시지역으로 인접 광교신도시에서 용인의 교통입구 지역이다.
역사
지명 유래
상현동은 용인군 지내면 지역이다. 고려시대 용구현(龍駒縣), 조선시대용인현(龍仁縣)에는 지내면과 서변면, 기곡면 사이로 느진재(느리재) 고개가 있었다. 느진재(느리재) 고개는 기울기가 완만(緩慢)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르내리기 쉬운 만현 고개(晩峴)라는 뜻이다. 이 지역 지내면 주민들이 만현 고개(晩峴)에서 서변면의 보수원(보정리) 삼막곡(三幕谷)을 거쳐 소일 삼아 현청과 읍내장이 있는 구성에 가기 위해 쉬엄쉬엄 넘었던 마을고개로 칭하였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용인군 지내면(枝內面)에서 상리(上里)와 만현 고개(晩峴)의 현(峴)을 취하고, 용인군 수진면의 정평리(亭坪里) 일부를 '지내면'으로 폐합한 지역으로 용인군 지내면 상현리가 되었다. 용인군 지내면 상현리는 상리(上里)에서의 ‘상(上)’자와 만현 고개(晩峴)의 ‘현(峴)’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만들었다. 마을에는 느진재(느리재) 고개가 있어 느진재(느리재)를 고개가 저문다는 뜻인 한어 만현(晩峴)으로 표기한 것이다. 예전에는 소금 장수가 현청, 읍내장이 있는 용인현(龍仁縣)구흥면에서 소금을 팔고 조선시대 역원(驛院)이 있던 서변면(西邊面) 보수원(寶樹院)에서 쉬었다가 만현 고개(晩峴)를 넘어갈 때 산의 마을인 소실봉 일대의 만현 고개(晩峴) 지형이 완만하면서도 하염없이 길게 늘어진 고개라고 하여 '느진재(느리재)'로 구비전승 되었다. 『1872년 지방지도』 용인현 지내면에는 만현 고개(晩峴)와 그 곳에 있는 심곡(深谷)이 확인된다. 용인현 지내면의 마을들 가운데 역원(驛院)이 있던 서변면 보수원(寶樹院)으로 통하는 심곡(深谷, 깊은말)은 원촌(院村)과 함께 서원말(院村)이라고도 하였다. 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심곡정암서원(深谷靜庵書院)이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이 커지면서 심곡과 서원을 하나씩 나누어 지명화한 것이다. 심곡정암서원(深谷靜庵書院)은 1605년 효종 때 세워져 정암 조광조의 제사를 지냈었고 서원말이라고 통칭하였다. 심곡정암서원(深谷靜庵書院)은 효종 때 건립과 동시에 '심곡'이라 사액되어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 서쪽에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소가 있다. 『1872년 지방지도』는 심곡에 정암 조광조 선생의 호를 딴 정암서원(靜庵書院)을 표시하였는데 정암서원(靜庵書院)은 심곡서원(深谷書院)을 지칭한다. 용인군 지내면에서 상리의 上자와 만현 고개의 峴자를 합쳐 부르게 된 상현(上峴)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정암서원(심곡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에서는 독바위(甕岩) 전설이 전해지는데 예전에 바위 두 개가 싸웠고 한쪽 바위가 ‘독해서 이겼다'고 하여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는 줄다리기 줄에서 숫줄은 동쪽, 암줄은 서쪽에 놓고 50~70m 길이로 만들어진 두 개의 줄을 통나무로 고정하고 남자 어른(동쪽)과 여자 어른, 아이들(서쪽)이 편을 나눠 줄다리기를 한다. 이때, 암줄이 이기면 마을의 전염병이 사라지고 그 해 풍년이 된다는 마을 풍속이 전해진다. 깊은 말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 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느리재) 고개는 현재의 만현 고개(晩峴)에서 '만현' 마을이 되었다. 만현 · 심곡 외에도 가산골 · 독바위(甕岩) · 삼막곡(三幕谷) · 절골(寺洞) 등 마을이 분포해 있었다.[1]
연혁
1914년 3월 1일 : 일제강점기일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내면(枝內面)의 상리(上里), 만현 고개(晩峴), 수진면 정평리(亭坪里) 일부를 합쳐 상현(上峴)으로 하였고 용인군 지내면 상현리에 포함되어 수지면으로 편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