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2월 5일인천상공회의소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를 창단했다.
첫 데뷔 경기였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인호봉의 호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5:3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두지만, 그 이후에는 9승(전기 리그 기준)밖에 거두지 못해 10승 30패를 거두었고, 후기엔 5승 35패, 1할 2푼 5리로 역대 기별 최저 승률을 거두었고, 정규 시즌은 15승 65패로 1할 8푼 8리의 불멸의 대기록을 세우며 6위에 등극한다.
특히 4월 25일 OB와의 경기에는 8점 차로 앞서 가다 역전패를 당하였고, 결국 이틀 뒤에 박현식 감독이 프로야구 최초로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듬해 12월 25일, 삼미는 팀 내 11명의 선수를 방출시켰다(김동철은 방출 이후 자살했다).
1983년
상위팀과 하위팀의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 결국 KBO는 전력 균형을 위해 애당초 1985년에 시행 예정이였던 재일동포 영입을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따라 삼미는 재일동포 장명부와 이영구를 영입하고, 또 다른 인천 야구의 대부인 김진영 감독을 영입, 여기에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이 가세하면서 재창단을 방불케 했다.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억 3천만 원에 부대비용 5천만 원을 받은 장명부는 ‘1억 원의 사나이’로 불렸다. 그러나 시범경기 때만 해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다. 특유의 엉거주춤한 투구 폼과 아리랑 볼에 가까운 구속에 야구인들은 입을 모아서 “일본 프로야구의 퇴물을 너무 비싸게 사 왔다”고 지적했다. “타자들을 테스트하고 있을 뿐”이라는 장명부의 진가는 시즌에서 나타났다. 삼미가 치른 100경기 중 60경기에 출장해 30승(28선발승) 16패 6세이브를 올린 것. 최다 선발(44), 최다 완투(36), 최다 투구(427⅓이닝), 최다 타자(1,712), 최다 실점(175) 등 각종 시즌 기록을 세웠다.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지만 구위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코치였던 이재환은 “볼 스피드의 완급 조절과 제구력, 그리고 마운드 운영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밝혔다.
'원투 펀치’ 장명부와 임호균은 42승을 합작했다. 이해 삼미가 거둔 승수는 52승이었다. 그럼에도 삼미는 한국시리즈를 밟지 못했다. 전·후기리그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6월 6일 전기 리그 우승까지 매직넘버 11을 기록하며 유리한 고지에 올랐으나 남은 12경기에서 3승 9패로 추락하며 해태(현 KIA)의 추월을 지켜봤다. 6월 1일 MBC(현 LG)전에서 심판 판정을 둘러싼 격렬한 항의로 김진영 감독이 구속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후기 리그에서도 선두를 달렸지만 8월 22일 백인천 코치 겸 선수가 가정사로 구속되며 동력을 상실했고 삼미는 내년을 기약했다.
1984년
1983년 삼미는 장명부의 빛이 발했다면 1984년은 어둠이 짙게 내렸다.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이해 12승을 올린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 강화를 위해서는 센터 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임호균의 공백은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지만 이들이 거둔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쳤다. 또 장명부는 30승에 따른 1억 원 보너스를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태업성 플레이로 일관하며 13승 20패 7세이브로 추락했다. 필드에 나서기 전에 내부 싸움에 지친 삼미는 전·후기리그에서 다시 꼴찌로 떨어졌다.
1985년
1985년은 더 비참했다. 3월 30일 롯데와 치른 개막전에서 5-1로 승리를 올릴 때까지는 ‘Again 1983’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 달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18연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4월 30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4-0 완봉승을 거두며 기나긴 연패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이날 인천 도원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연패 탈출의 기쁨도 잠시 5월 1일 경영난을 겪던 삼미는 청보에 70억 원에 구단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전기리그까지는 삼미 유니폼을 입고 뛰기로 해 6월 21일 롯데전이 고별 무대가 됐다. 6-16으로 대패하며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려는 소박한 꿈마저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인수 원인은 1984년 7월부터 삼미그룹의 주력회사인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 등 경영난과 성적부진이 가장 큰 매각의 원인이 되었는데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없었던 것도[1] 컸다.
1차로 삼미 해운을 처리한 삼미그룹은 1984년 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을 산업은행에 290억에 매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 1984년 동안에 45억1천만원의 적자를 낸 야구단을 유지 할 수는 없었다. 많은 홍보를 필요로 하는 소비재 분야의 계열사가 전혀 없는[2] 삼미 그룹의 성격상 야구단이 창출하는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데다 85시즌 개막과 함께 이어진 연패로 인한 그룹 이미지 실추는 구단의 매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이후 청보 핀토스로 재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