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 정벌 후, 누마타령 2만 7천석은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반환되지만, 마사유키는 시나노우에다성을 거성으로, 지리적으로 떨어진 누마타령은 적남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맡겼다. 이 시기의 노부유키는 사나다가 당주 (마사유키)의 후계자였으며, 공적으로는 누마타령도 마사유키의 영지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것이 후대 누마타번의 기초가 되었다.
노부유키는 영내 검지를 일찍부터 실시하여, 영내 지배체제를 굳혔다. 게이초 5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혼다 타다카츠의 딸)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에다성의 마사유키와 차남 노부시게 (유키무라)는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가 속한 도쿠가와군을 상대로 우에다성에서 선전했으나,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패했기 때문에 전후에는 키슈 쿠도야마에 칩거하게 되었다. 대신 노부유키에게 누마타령을 포함한 마사유키의 구령에 더해 3만 석이 가증되어 9만 5천석의 영지를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 (우에다번의 성립).
겐나 2년 (1616년), 노부유키는 우에다로 옮겨, 누마타령은 노부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요시에게 계승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도 정식 입번은 아니다). 노부유키는 겐나 8년 (1622년)에 시나노마츠시로번 10만석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누마타령은 분지되지만, 아직 막부에 공인된 번으로는 되지 않았다.
노부요시는 간에이 11년 (1634년) 11월 2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후계는 노부요시의 아들인 쿠마노스케가 이었으나, 그 역시 간에이 15년 (1638년) 11월 6일, 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듬해 7월 25일, 누마타령의 대부분을 노부유키의 차남인 노부요시의 동생 노부마사가 잇고, 노부요시의 차남 노부토시에게 5천석이 분지되었다. 노부마사는 영내 검지 등을 실시하여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메이레키 2년 (1656년)에 노부유키가 은거함에 따라, 마츠시로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고, 대신 누마타령의 모든 것을 노부토시가 잇게 되었다.
메이레키 4년 (1658년) 2월에 본가를 이은 노부마사가 사망하자, 노부나오 (노부토시)와 노부마사의 6남이자 2살배기 노부후사 (후의 유키미치) 중 어느 쪽을 세우냐에 따라 후계자 다툼이 발생했다. 결국, 노부후사가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게 되었는데, 이 소동으로 누마타령 (누마타번)은 정식으로 마츠시로번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노부나오는, 간분 2년 (1662년)에 누마타령 검지를 실시하여 실고 3만석 (일설에 의하면 6만석)의 소령을 14만 4천석으로 막부에 과대 신고하였다. 이에 따라 영민들은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폭거라 할 수 있는 소업에 관해서는 사나다 종가의 가독을 잇지 못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엔포 8년 (1680년), 노부나오는 막부 명령에 의해 에도료고쿠바시의 수리를 위해 용재를 누마타번으로부터 내줄 것을 청부받았으나, 이미 피폐해져있던 영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노부나오는 용재의 납기를 맞추지 못한 책임을 물어 개역되었다.
번청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다른 지방으로 이전한 번도 있다. 순번은 『삼백 번 보신 전쟁 사전(三百藩戊辰戦争事典)』에 따른다. 메이지 시대의 변화: ★=신설、●=폐지、○=이전・개칭、▲=본번에 병합. 소괄호()안은 이전・개칭・병합된 후의 번명이다. 소괄호가 없는 것들은 현에 편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