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이 때이 문학사조를 문학사학자들은 순수서정시라고 부른다.
1935년 첫째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지자 《독(毒)을 품고》등의 저항시를 썼다. 이후 신사참배, 창씨 개명등에 저항하여 두어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시작 활동에 전념하다가 고향인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 했다가 낙선하였고, 공보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
문학 세계
김영랑은 사회주의 문인들인 카프 문인들이 쓴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진 일제강점기 말에 쓴 《독(毒)을 품고》가 그 예이다. 주로 ㄴ, ㄹ, ㅁ, ㅇ같은 부드러운 소리(유음, 흐르는 소리), 남도 방언등으로써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