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후(具仁垕, 1578년 ~ 1658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척신으로 인조의 외사촌 형이다. 휘는 인후(仁垕),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생애
초기
1578년 대사성 구성의 아들이자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손자로 태어났다. 구굉과 인헌왕후의 조카로 인조에게는 외종형이 된다.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어받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1611년(광해 3) 고원군수(高原郡守), 갑산부사(甲山府使)를 지냈으며 1614년 선전관이 되었다.
인조반정에 가담
1621년 진도군수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감을 품고 이서·신경진 등의 인조반정 모의에 참여하였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외지에 있던 그는 서울에 도달하지 못하여 거사 현장에는 없었으나, 처음부터 반정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1624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 활동
1627년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였을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후금의 군사를 막아 싸웠다. 1628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한성부 판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포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하였으며, 그 후 어영대장, 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어영대장으로 있던 1644년에는 심기원의 모역음모를 적발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만년
훈련대장, 공조 및 병조판서를 거쳐 효종 즉위 후 1653년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사사당한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고 사형당한 김홍욱을 두둔, 옹호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나 곧 복관되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