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1537년(중종 21년)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1546년(명종 1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관직은 승지, 대사헌,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우찬성,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영중추부사 겸 약방 도제조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자(字)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勖齋), 만취당(晩翠堂)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별칭은 심상공(沈相公)이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 등과 함께 권력을 남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으나, 1567년선조가 즉위한 후 율곡 이이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1]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 심충겸 형제 및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종조부이다. 이량, 김안로,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척신 세력이었으며, 특히 이량, 윤원형과 함께 3흉으로 불렸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 기묘명현(己卯名賢) 심달원, 동지돈녕부사 심봉원(沈逢源)의 동생이다.[3] 명종의 장인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의 숙부로, 그 딸인 명종비 인순왕후는 심통원의 종손녀이다.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인의 초대 영수 청양군(靑陽君) 심의겸,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청림군(靑林君) 심충겸 형제와 청성부원군 심희수(沈喜壽)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다. 1519년(중종 13) 생원시에 13등으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37년(중종 31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료 생활
1541년(중종 36) 종사관의 물망에 올랐다. 1543년 2월 세자 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재직 중 경연에서의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평소 물론이 있고 전에 본원(本院)의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서연(書筵)에서 강론할 즈음에 바르지 못한 논리를 발설하고도 굳게 고집하고 좀처럼 반성하지를 않는다'고 하자 왕이 수락하여 면직되었다.
1560년 초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 심통원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에 이어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1564년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세우자, 윤원형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심통원은 그를 지원하였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서 윤원형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으며, 3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으며 약방 도제조를 겸하였다.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5]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그러자 이준경이 심통원에게 일렀다.[6]
"태의가 전하를 진맥해 본 결과 아무 약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좌상께서 내의원 별당으로 가서 그 약을 좀 가져오시지요.[6]" 심통원은 수하에게 영상의 명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자 이준경은 눈을 부릅뜨고 심통원을 꾸짖었다. "전하의 환우가 심히 불안한 지경인데 상감께 올릴 약을 어찌 아랫사람에게 시킨단 말이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6]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6]"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써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6]
말년과 사후
선조[7]가 즉위한 뒤 심통원은 1567년 명종 때의 외척으로 윤원형 등과 함께 뇌물을 받고 권력을 축재하였다는 율곡 이이의 탄핵을 받았다. 왕대비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죄를 감면하자는 여론이 나오기도 했으나, 아부한 죄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고, 이이 등이 다시 탄핵상소를 올려 관직을 삭탈당했다. 1572년 사망 당시 향년 7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