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 자랐으며 왕실 결혼과 가족 여행에 자주 참가하였다. 특히 그녀는 1893년 7월 6일 요크 공작조지와 메리 부부의 결혼식에서 신부 메리의 들러리[2]가 되었다.
캐나다
패트리샤는 여렸을 때 자주 여행을 다녔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는 영국령 인도에 있었던 육군 장교로 파견하였다. 그래서 패트리샤는 2년 동안 인도에 머물렀다. 오늘날 인도뉴델리의 금융 중심지인 코넛 플레이스(힌디어판, 펀자브어판, 우르두어판, 영어판)는 아서 공작의 작위 이름에서 따왔다. 1911년 영국 정부가 그녀의 아버지를 캐나다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로 패트리샤는 부모 따라 캐나다로 이민가서 캐나다의 대중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1917년 3월 17일에 발행하였던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의 1 캐나다 달러 지폐는 패트리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1918년 2월 22일부터 임종할 때까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의 명예 연대장으로 지냈다. 패트리샤 공주의 이름으로 지었던 이 연대는 앤드류 해밀턴 골트(영어판) 준장이 자기의 자금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영 제국에서 사적으로 구성된 마지막 연대였다.[3] 패트리샤 공주는 연대의 프랑스 파견에 쓸 배지와 상징색을 직접 디자인하였으며 1919년에 그녀의 결혼식에서 연대가 직접 참관하여 행진곡을 연주하였다.[4] 그녀는 자신의 패트리샤 연대에서 명예연대장으로서 죽을 때까지 군인들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1974년에 그녀의 사촌 여동생 겸 대녀인 제2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여백작 패트리샤 내치불에게 명예 연대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참고 5] 파트리샤 공주의 캐나다 경보병 연대의 제2대 명예 연대장이 되었던 패트리샤 내치불은 모든 연대원들에게 자기의 존함을 부르지 말고 그녀의 전임자를 존경한다는 뜻으로 레이디 패트리샤(Lady Patricia)로 부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결국에 패트리샤 공주는 왕족 출신 대신에 서민 출신의 남편과 함께 결혼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아버지의 측근 중에 한 명, 제13대 달하우지 백작 존 램지(영어판)의 3남, 그리고 나중에 제독으로 승진하였던 더 아너러블 알렉산더 램지 영국 왕립해군중령과 함께 결혼하였다. 두 명은 1919년 2월 2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
그녀의 결혼식에서 자발적으로 로열 하이너스(영어판)라는 호칭과 영국의 공주(영어판)라는 왕족의 작위를 공개적으로 포기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후작 부인의 곧바로 밑 단계의 호칭인 레이디(Lady)를 대신 부여하였다.
↑패트리샤 공주와 알브레히트 왕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통해서 같은 핏줄을 이어 받았으며 그녀의 외삼촌인 올덴부르크 대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대신 대부의 역할을 맡았다.
↑영어 원문: To the memory of The Lady Patricia Ramsey, VA, CI, CD late Colonel-in-Chief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who as H.R.H. the Princess Patricia of Connaught worshipped here while resident at Government House 1911-1916.[5]
↑그녀는 그 당시 제7대 브레이번 남작 존 내치불의 아내였으며 제2대 마운트배튼오브버마 여백작(2nd Countess Mountbatten of Burma)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