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에 대한 쿠데타 외에도 형제들 몫의 유산에 대해 통제하려 했고, 광범위한 정치적 대책을 세웠다. 한편 아버지를 쿠데타로 몰아낸 것에 대해 다른 친척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사촌인 브란덴부르크선제후요아힘 1세는 아우구스부르크로 가서 프리드리히 2세의 축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카지미르에게 팔레센부르크 성에 가서 진상을 밝힐 것과 프리드리히 2세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카지미르는 이를 거절했다. 영지가 없었던 그의 동생 알브레히트는 황제의 편에 서서 활동했고, 그의 동의를 얻어 성직자가 되었으며 추기경의 직위에도 내정되었다. 1522년 그의 또다른 형제들은 자기 몫의 영토를 요구하였는데, 그해에 가서 영토분쟁 및 아버지를 쿠데타로 몰아낸 것에 대한 친척들과의 갈등이 해결되었다.
1502년에는 뉘른베르크 자유시와의 분쟁을 겪었다. 카지미르는 뉘른베르크 후작령 외에 자유시 내의 호엔촐레른 왕가의 영지를 되찾으려 했고, 뉘른베르크 자유시는 도시의 자치권을 보호하려 했다. 시의회는 뉘른베르크 자유시에 대한 카지미르의 주장을 차단하려 했고, 카지미르는 군사를 일으켜 뉘른베르크를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카지미르는 뉘른베르크의 영유권을 포기했지만 후일 뉘른베르크 자유시와 영토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1499년 카지미르는 슈바벤 전쟁에 출정하였다. 1522년 그는 제국의회 의원을 탈퇴한다. 1522년에 그는 다시 뉘른베르크 자유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고, 뉘른베르크 자유시 및 토마스 폰 압스베르크와 그의 동맹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프랑코니아 전쟁) 이 전쟁에서 그는 압스베르크의 여러 성곽을 파괴하였다.
카지미르는 독일 농민 전쟁에 황제측의 지휘관으로 출정했다. 1525년 첫 독일 농민 전쟁 당시 뷔르츠부르크 주교 튀링겐의 콘라트 2세와 밤베르트 주교 리드비츠의 베간트 등과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1525년 봄 카지미르는 슈바벤의 오덴발트와 함께 농민군의 유혈사태에 대한 공동 대응을 논의하였다. 카지미르는 두 주교와 귀족들과 협의한 후 농민전쟁에 출정했다. 한편 그의 동생 게오르크는 농민군을 지지하였다. 뷔르츠부르크 주교가 이끄는 군대가 농민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마리엔부르크와 뷔르츠부르크로 퇴각하고 만다.
그는 상당한 돈을 투자하고 개인적 노력을 투자하여 자신의 영토에 침입한 농민군을 격퇴하였다. 동시에 그는 용병을 고용하였다. 그는 로텐부르크 오브 타우어에서 농민군을 격퇴하고 다량의 전리품을 챙긴 뒤 퇴각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농민군의 일부를 수도원으로 피신시켰고 로텐부르크에서 다시 폭동이 발생하여 로벤하우센-안하우센, 베르데크-게라보른, 발베르크-바이센바흐 등으로 폭동이 확산되었다. 카지미르는 안스바흐에서 퇴각했다가 프랑켄에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프랑켄의 군대는 그의 지시를 따르기를 거절했고, 카지미르는 요새화된 성을 지키기 위해 보헤미아인으로 구성된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였다.
정식 제식훈련을 받지 못한 농민군은 슈바벤 전쟁과 뷔르츠부르크 주교의 다른 동맹군 연합에 의해 뷔르츠부르크 지역에서 패배했다. 그들의 저항과 사기는 대규모 손실로 인해 붕괴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에게는 블러드하운드(Bloodhound)라는 별명이 붙었다. 농민군은 별 약탈과 저항 없이 항복하였지만, 카지미르는 반란군의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그는 마을을 불태우고 3백여 명을 처형했다. 반란군의 지휘관 중 하나인 루트비히 폰 후텐에게 더이상의 약탈과 학살은 없다고 약속했지만 카지미르는 루트비히의 오른쪽 손과 가운데 손가락을 자르고 그의 눈을 멀게 한 뒤 추방해버렸다. 또한 58명의 눈을 뽑아버렸다. 로텐부르크에서도 처벌과 학살이 계속되었으며, 이때 처형된 반란군의 피로 땅이 붉게 물들었다 한다. 그는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을 가했고, 1526년11월에 가서 처벌을 중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