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의 지지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호의적 정책을 유지하는 한편, 아버지 게오르크에게서 물려받은 각처에 분산된 영지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는 주지사를 파견하는 한편, 영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행정, 관리기능의 쇄신을 단행하였다. 호엔촐레른 왕가의 분가인 프랑켄, 안스바흐 분가의 마지막 당주이다. 라틴식 이름인 게오르기우스 프레데리쿠스(Georgius Fridericus)라는 이름도 사용했었다.
그는 폴란드에 있던 자신의 영지에는 주지사를 파견하여 대신 위임 통치를 하게 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관료를 채용할 때는 독일어 구사 능력과 폴란드어 구사 능력을 철저하게 시험, 검증하고 채용하였다. 한편 그가 바이로이트와 콜름바흐를 계승한 직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그가 바이로이트 지역을 상속받기 전부터 그 지역에서의 광산 채굴업으로 이익을 챙겼다고 문제삼기도 했다. 1549년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오폴레공작령을 차지했다. 그리고 1551년부터 자신의 대리인으로 헝가리 왕인 존 지그문트 자폴리아와 그의 모후 이사벨라 자폴리아를 선정하여 대신 통치하게 했다. 1556년에 이르러 게오르크는 오폴레공작령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폴레 지역은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폴레의 영유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1]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안스바흐에 체류하면서, 이러한 영지들을 직접 관리했으며 각처에 성주와 주지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통해 영지를 다스렸다. 먼저 그는 자신의 고향 프랑켄에서 행정 운영을 결재라인을 체계화, 조직화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크르노프의 공작령은 이웃 제후인 게오르크 폰 리그니츠-브리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의 금융 시스템의 조달 및 지역 조직의 관리에 부심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 교역 거점을 만들고 시장을 조성하여, 상거래의 중심지로 키웠다. 특히 그는 제2차 후작 전쟁 등으로 황폐해진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에 인구 유입을 받아들이고, 인구 증가를 통해 군사력을 확충시키고 재정을 개선하였다. 이로써 재정이 황폐화되었던 쿨름바흐 지역에 군사력, 경제력을 확보했다. 동시에 그는 쿨름바흐 지역의 개신교 포교를 허용하는 선을 넘어 개신교도 관료들을 대거 채용하였다. 쿨름바흐 지역의 개신교 교회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를 자신들의 종교적 지도자로도 추대했다. 또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팔레센부르크 성에 건축가카스퍼 비쳐(Caspar Vischer)를 보내 도시의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쿨름바흐에 쿨름바흐 철학교(Schola Culmbachiana)를 설립, 후원하였고, 하일스브룬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중등 학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중학교를 설립, 후원하여 교육을 재정비했다. 쿨름바흐의 쿨름바흐 철학교는 그의 사후 후작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김나지움(Markgraf-Georg-Friedrich-Gymnasium)으로 개명되었다.
1578년부터는 정신질환과 정신분열 증상을 앓던 사촌 동생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을 대신하여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직도 겸하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에도 그와 비슷한 패턴으로 정치를 보좌하였으며, 법과 질서 확립에 치중하였다. 또한 그는 세금 조달이 원활해지는 방법을 연구, 분석하였다. 그밖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국가 내의 상류 계급의 권한을 억제, 통제하였는데, 상류 계급의 재산, 노동자, 제조업 공정 비용, 재산 상속 등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슐레지엔의 재정은 안정을 구가했지만, 그의 친개신교적 정책에 반발하는 이들이 있어 종교적으로는 사회 갈등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크르노프의 영지에서는 체코어로 된 모라비아 토지법 등을 적용하여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생애 후반
1561년4월 23일부터는 폴란드의 크르노프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게오르크부르크를 건설했다. 근처의 야산에서 광산을 채굴케 하여 지역의 자체 소득원을 만드는 한편, 소금 무역 시장과 양조장, 정원이 있는 주점 등을 건설하여 도시의 소득원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궁정은 르네상스 시대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인상적인 궁정의 하나였다. 하지만 1552년과 1554년의 마르그라베 전투 기간 중 모두 파괴되었다. 그밖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뷀츠부르크와 바이로이트에 궁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1577년우울증이 심화되면서 정신질환을 겪게 된 사촌동생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의 가까운 친척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의 섭정을 맡았다. 그의 섭정직에 대해 폴란드 왕국 내에서의 일부 반발은 있었지만 그는 1578년폴란드의 국왕스테판 바토리에 의해 섭정직을 공인받았다. 1578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약하였다. 그는 폴란드 왕 스테판 바토리의 협력을 얻어 프로이센 공국 내에서의 영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관료 채용은 폴란드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자를 채용하되 직접 선발하는 등의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프랑켄 지역의 관료들을 프로이센 공국으로 보내, 행정 실무, 금융 정책, 조세 정책, 행정 관리 등의 제도를 프랑켄 지역을 모델로 하여 프로이센 정치에 적용하였다.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요한 키케로-요아힘 1세 네스토르-요아힘 2세 헥토르-요한 게오르크-요아힘 프리드리히, 요아힘 에른스트, 크리스티안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프리드리히 2세-게오르크-게오르크 프리드리히 *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요한 키케로-요아힘 1세 네스토르-요한 폰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의 엘리자베스